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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재나 Sep 27. 2024

사람 대신 오이를 때려요 04

시즌마다 아무것도 안해도 미운 사람이 있다. 

사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다.

나를 정말 거슬리게 하고, 내 일을 방해하는 사람. 내가 내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좀비세상이고 핵폭탄이 터진 이후에 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면 이 악물고 뒷통수라도 쎄게 때리고 싶음 심정이다.


그 사람의 존재는 인생의 시즌마다 달라진다. 

이제 그런 사람의 존재가 많아지니까, 이제는 내 문제가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람을 만드는 원흉이 아닐까 싶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예전엔 그런 사람이 생기면, 애인이나 친구 가족들에게 침이 튀도록 욕을 했다.

그러면 풀리기도 했다. 요즘엔 그런 것들이 크게 의욕이 없다. 그 상황을 컨트롤하지 못한 내 잘못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왜 자꾸 싫고, 미운 사람이 생길까? 만원 지하철 안에서 몸을 기대고 고민했다.


내가 면접을 볼 때 하는 단골 질문이 있는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는지?'이다.

그 만큼 직장인에게 스트레스 해소법은 중요하다. 나 조차도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는지 모르겠는데, 누가 누구한테 질문을 한다는 말인가.


저녁은 토마토 하나 정도였다.

간촐한 식사였다. 남편은 출장에 갔고, 나는 여전히 강남역에서 갖고온 분노를 분출하지 못해서 얼굴이 나의 저녁식사의 토마토 만큼 벌게진 상태였다.


냉장고에서 토마토 옆에 놓인 오이 한 개를 발견했다. 얼마전에 콩국수 위에 고명용으로 사놓은 녀석이다.

갑자기 변덕이 생겨서 오이 특유의 개운한 맛이 먹고 싶어졌다. 결국 토마토 대신 오이를 꺼냈다.


지금 오이로 할 수 있는 요리는 검색해보니 오이 비빔밥 정도였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나온 오이 비빔밥을 따라해봤다.

오이는 그냥 씻으면 농약이 깨끗하게 씻기지 않아 소금으로 닦아내야했다. 

레시피 영상에서 당황스러운 장면이 나왔다. 영상 속에서 오이를 미친듯이 패고 있었다. 오이를 때리면 수분감이 더 많아져서 맛있어져요. 정말? 너무 귀엽고 어이가 없었다.


지퍼락에 오이를 넣어서 나도 오이를 때려본다. 때릴 때 마다 오이 특유의 향이 부엌 가득 채워진다. 쿵쿵 소리가 너무 커서 옆집에 민폐를 끼칠까봐 중간 부터는 눈치를 살살보면서 천천히 때렸다. 오이는 조각이 났지만 생각 만큼 부숴지진 않아서 칼로 깍둑 썰어냈다.


후아, 부숴지고 썰어진 오이를 보며 숨을 크게 내쉬어본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매콤하게 먹고 싶어서 청양고추도 쫑쫑 썰었다.

영상에서는 닭가슴살을 넣었으나, 나는 요즘 빠진 비건 참치를 넣었다. 기존 참치보다는 덜 기름져서 손이 자주 갔다. 다진마늘, 간장, 알룰로스, 들기름와 깨를 넣고 비빈다.


아삭하고, 시원한 오이향과 매콤한 청양고추가 너무 잘어울렸다. 

이 날 저녁이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남편도 없고 손님도 없는데 나를 위해서 칼을 썰어서 요리를 해본 것이 말이다. 비빔밥이 요리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티비에 침착맨의 웃긴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싹싹 긁어서 먹었다


회사에서 지하철을 타고 갖고 왔던 분노와 불안감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이면 다시 생길 기분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오후 8시 28분에는 없었다. 나는 맘을 놓고 침착맨의 말에 깔깔 웃으면서 저녁을 보냈다.


"스트레스 어떻게 푸세요?"

"오이를 사람 대신 때립니다. 팹니다. 죽어라 패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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