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좋고, 아무 일도 없는 날은 정말로 그냥 이대로 나를 다스려가면서 살면 된다고 다짐이 쉽게 되는데,
어느 날은 팽팽한 고무줄이 툭하고 잘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없어진다
이대로 숨이 끊어지거나, 사라지고 싶어진다.
살아온 세월보다 더 살아야하고, 지금까지 보다 더 잘해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매일 걷던 길도 갑자기 걷기가 힘들어진다. 몸이 너무 무겁고 버겁다.
겨우 집에 돌아오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갇혀버린다.
눈물은 안 나는데 울고 싶은 기분이다. 이겨내야하는데, 이겨 낼 수 있는데 어떻게 하더라.
나는 순식간에 1+1 처럼 쉬운 문제를 풀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 것도 해낼 힘이 없고 하고 싶지 않다.
쉬운 문제도 어렵다면, 나는 더더 쉬운 것을 먼저 한다.
물론 이걸 결심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하지 못하고 울면서 잠에 드는 경우도 많다.
우선, 강아지와 산책을 나간다.
어떤 강아지들은 주인이 울거나, 감정의 동요가 있으면 같이 느끼고 위로를 해준다고 하는데 철없는 우리집 9개월 짜리 강아지는 그런 건 모른다. 그냥 9시간 만에 만난 내가 반갑고 얼른 산책을 가거나 놀아줬으면 하는 마음만 있다. 같이 위로해주는 강아지가 아닌 것이 크게 아쉽지는 않다. 이 철없음에 나는 오히려 내 감정을 조금 접어두고 강아지가 원하는 산책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느리게 엘리베이터를 눌러 내려가면서, 항상 가던 30분거리의 산책로를 중간에 생략하고 돌을 건너서 돌아올까 생각했다.
강아지가 오줌을 싼다. 이제 충분히 영역표시 했으니까 이제 중간에 돌아갈까? 한다. 나는 그냥 집에 가서 액체괴물처럼 늘어지고 싶을 뿐이다.
두 다리를 힘없이 걷다보면,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보인다. 중간에 힐끔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아침 저녁으로 매일 같은 길을 걷는데도 우리집 개는 항상 새로운 곳에 온 것처럼 기뻐하며 뛰어간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갔다. 핫플 성수동도 저번에 갔던 똑같은 카페는 안 가는데, 왜 강아지들은 매일 같은 길에도 신나할까. 지루하지 않을까?
나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산책로는 매일이 아니라 매시간 다르게 느꼈다.
매 시간 온도나, 냄새, 습도, 풍경이 달랐다.
아침에는 분주하게 학교에 가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고, 저녁에는 오리 가족들이 유유자적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방학이 되면 아침은 고요하고 직장인 몇몇만 아침을 지나가게 하고 비가 많이 온 날 저녁에는 손바닥 만한 두꺼비가 길모퉁이를 지키고 있다. 으악 하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인간도 산책로가 하루가 아니라 매시간 갈 때 마다 다르게 느껴지는데, 오감이 7배 이상 더 뛰어나다는 강아지는 당연히 매일 새로울 것이다.
한 발 한 발 강아지와 같이 걷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잘 보여진다.
한 번에 20분, 하루 40분 걷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진다.
고작 20분짜리 산책이 갑자기 나의 무기력함을 사라지게 만든다.
매일 같은 거리를 걷고 돌아오는 강아지의 눈빛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초롱초롱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산책에서 얻어낸 에너지로 강아지의 흙 묻은 발을 닦고 물을 준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물통에 물이 거의 없다.
그렇다. 오늘의 요리는 물 끓이기다.
처음에는 간편하게 티백으로 나온 대기업 보리차를 썼는데, 언젠가 쌀을 살 때 사은품으로 받은 보리를 다시다팩에 끓여보니 더 구수하고 맛있어서 보리로 바꿨다.
어릴 때 집에서는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큰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줬다.
지금처럼 정수기나 페트병 생수가 보편적이지 않아, 안전하게 수돗물을 먹기 위해 썼던 방법이었지만 10대 내내 보리차를 먹었던 나는 성인이 되고 정수기물에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너무 싱겁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보리차를 주면 밥이 그냥 그래도 점수를 높게 쳐줄 정도 였다.
보리차는 요리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물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정수기 물에 비해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이다.
물을 끓여놓고 있으면, 적절한 시간에 맞춰서 불을 꺼야하기 때문에 부엌을 신경써야한다.
부엌과 거실에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시끄러워질 때 쯤 툭, 하고 약불로 줄인다.
10분은 쎈 불로 5분 은 약불로 더 끓이면 더 구수하다.
다 끓인 보리차는 적당히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나는 어렴풋이 내일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저녁을 먹을 때는 냉장고 안의 시원한 보리차를 먹을 수 있겠다, 라고 계산해본다.
식은 보리차를 1L 짜리 물병에 가득 담는다.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물병을 만져보고, 충분히 식었다고 판단되면 냉장고에 넣는다.
물통에 꽉 차서 들어가지 않아 남은 보리차는 버리면 아깝기 때문에 내가 마신다.
입안 가득히 보리향이 퍼진다. 보리차는 정말 맛있다. 물이 무슨 맛이냐. 하겠지만 적당히 달고 적당히 구수하고 적당히 부드러운 너무 완벽하게 맛있는 물이다.
보리차를 두 모금 마실 때 쯤에는 나의 우울과 불안은 보리차의 향처럼 어디론가로 퍼지고, 옅어진다.
두 발이 런닝머신이 아닌 흙으로 된 길을 걷는 것은 어디로 안착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하지만 결국 0.1초 전에 잘 해냈던 것처럼, 잘 딛고 걸어나가기 때문에 다시금 뇌는 안정을 느낀다고 한다. 어떤 엄청나게 어려운 호르몬이 나온다고 했던 것도 같다.
오늘도 나는 못할 것 같았던 것을 해냈다. 쉬울 지도 모르지만 해냈고, 잘 보냈다.
미지근한 보리차의 온도는 내 몸의 온도와 비슷하다. 내 몸은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보리차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평온하다. 나는 이 감정을 잘 보낼 것이다.
거실에서 보이는 창문에서 보라빛으로 해가 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