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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pr 21. 2021

안다고 이해하는건 아니더이다(feat. 사춘기)

같이 자라는 중

아이가 어릴 때 나는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 게 가장 컨디션이 좋은 지, 어떤 책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등등. 아이의 불호와 아이의 예상 행동반경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이를 잘 알았다.


세월이 지나니 그분이 가끔 아이 안에 들어오신다. 그분이 오시면 내가 알던 아이는 그 아이가 아니다. 예상 행동반경에서 늘 빗겨나간다. 그야말로 누구세요를 외치고 싶은 마음, 맞다. 그분은 사춘기다.


아직 상주하지 않는 그분이시지만 이번엔 흔적을 남기고 가셨다. 갑자기 귀걸이 타령이다. 나는 스무 살 넘어서 뚫었는데 고작 열몇 살이 귀를 뚫어?라고 튀어나오는 말을 억지로 누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 아이에게 그 정도는 네가 검색해보라 했다. 혹시 검색하다가 마음이 바뀔 것도 은근 기대하면서. 기대한 일은 당연히 없었고 몇 군데를 금세 추려왔다. 한 곳만 콕 찍어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알아보라고 말했다.


“**역 #번 출구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얼마큼 가면 있대. 오픈은 10시고  저녁 7시에 문 닫아. 학원 시간 맞추려면 우린 2시쯤 나가면 될 거 같아.”


응? 이런 추론적 사고도 가능했어? 그동안은 뭐였니?


가끔 그분이 오래 계실 때 “내가 아는 너는 이게 아니잖니”라고 진상을 부리고 싶었다. 그 진상이 종국에는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관계를 망치거나 둘 중 하나일 걸 알면서도 그런다. 그때마다 아이가 찾아온 ‘무슨 역 몇 번 출구, 몇 시까지’의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자 너머가 읽힌다. 아이가 이만큼 컸다고. 아기 냄새 폴폴 나는 시절 어딘가에 혼자 주저앉아 청승 떠는 일 그만 하라고.


앎이 쌓이면 저절로 이해가 되는 줄 알았다. 적어도 양육에서는 아니었다. 울며불며 초보 엄마 시절을 지나서 앎이 쌓였으나 이제 이해하기 위해 두 번째 초보 엄마 시절을 지난다. 알기 위해 몸이 힘들었고 이해하기 위해 마음이 고되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머나먼 여정을 이제야 시작한다.


아직 반도 못 온 여정이지만 내게 필요한 말을 주문처럼 외워본다. 그분과 함께 너의 세계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기를. 늙은 어미 눈엔 너의 휘저음이 대부분 뻘짓으로 보이겠지만 나 역시 너의 나이에 그랬겠고 그게 그 나이에 할 일이라고 이해하기를.


아이의 귓불에 박힌 작은 귀걸이가 아이만큼 반짝인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스크린 도어에 자꾸 확인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다시 내게 말했다. 아는 시절을 지나 이해하는 시절로 가라고.




내일, 아코더 작가님은 '막국수’ 과 ‘냉면’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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