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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코더 Apr 22. 2021

막국수 좋아하세요? 냉면 좋아하세요?

메밀면 트라우마


지난 5월, 하얀 메밀꽃이 끝없이 펼쳐진 제주 메밀꽃 축제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며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메밀꽃길을 그녀와 걸었다. 메밀꽃처럼 하얀 피부, 여리여리한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름이 왜 막국수 일까?
대충 막 지어서 막국수 일까?
왜 족발을 시키면 냉면이 아니라 막국수가 오는 걸까?
냉면이 불은 것이 막국수 일까?
사실은 냉면인데 불어서 '이제 막' 국수가 되어서 막국수라고 이름 붙인 건 아닐까?
어쩌면 냉면과 막국수는 메밀이 낳은 쌍둥이 자식이 아닐지...?



애석하게도 나는 막국수를, 그녀는 냉면을 주문해 함께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없었다.






그녀는 냉면 매니아였다. 음식 취향이 확고한 그녀는 그중에서도 평양냉면, 물냉과 비냉 중에서는 매콤 새콤 비빔장이 들어간 '비빔 평양냉면'을 좋아했다.





땀 뻘뻘 나는 여름날, 가늘고 긴 메밀 면발빨간 양념과 무생채가 올라간 비빔냉면, 그 위에 살얼음 낀 육수를 사르르 올린다.

한 젓가락 후루룩 들이켰을 때 입안 가득 퍼지는 메밀향과 알싸하면서 새콤한 그 맛을 그녀는 사랑했다. 


꼭꼭 씹다가 안 씹히면 에잇 하고 꿀떡 삼켜도 소화되는 고마운 냉면. 뜨끈한 육수 한 컵 놓고 호호 불어가며 마시면 혀의 통각은 더도 속은 뜨끈하다.


"38선을 넘지 않아도 함흥표, 평양표 냉면을 먹을 수 있어요. 함흥냉면은 전분을 뽑은 면을, 평양냉면은 메밀면을 삶아 내지요."


아무 드립을 쳐도 천사같이 배시시 웃어주던 그녀,


그녀는 나와 달리 막국수보다 냉면을 선호했다.





왜, 족발집 단골 사이드 메뉴로 막국수가 나오는 걸까. 냉면이면 안되었을까.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날의 일 때문이다.


나는 사실 그녀와 달리 막국수를 더 좋아한다.


그녀와 사귄 지 22일째 되는 날, 막국수를 먹기 위해 막국수 맛집이라는 족발집을 알아내 족발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족발에는 콜라겐이 들어 있어 여자들에게 좋다는 말이 그 날의 화근이었다.  




피부 트러블로 진료를 받아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는 모양...아닌가?



싸늘하다. 뭔가 잘못 짚은 듯한 느낌.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콜라겐이 좋다는 말 하지 말걸 그랬다. 그 말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나는 그 꼬리를 놓쳤다.



그녀는 젓가락을 툭 하고 내려놓으며 족발집을 떠났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별안간 이별통보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곱씹었다. 족발이 잘못한 건가, 막국수가 잘못한 건가, 아니면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도무지 퍼즐맞춰지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녀가 막국수보다 냉면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왜 인지 한번 더 물어볼 걸,

족발집으로 그녀를 불렀을 때, 컵에 음료수를 따를 게 아니라 그녀의 표정을 한번 더 볼 걸,

족발이랑 막국수를 시키기 전에 그녀에게 한번 물어볼 걸.


모든 게 내 잘못일까.


아니지. 막국수가 족발집에 있는 게 잘못인 거다. 그렇다고 족발집에서 냉면이 나오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


냉면에 겨자 식초 잔뜩 넣어 후루룩 먹고 잊으련다. 이제 막국수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겠다고 다짐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내게 닿기는 어려울 만큼 그녀는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얼마 후 그녀가 비건 동호회에서 만난 남자와 사귄다는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래, 족발화근이었구나.



아니지, 족발의 절친 막국수를 사랑한 내 탓이다.

냉면이 불어서 막국수가 된 걸까. 족발집에 막국수가 아니라 냉면이 사이드로 나왔다면, 우리, 괜찮았을 텐데.



그 날의 트라우마로 소개팅을 나가면 뜬금없이 던지는 첫 질문.



'냉면 좋아하세요? 막국수 좋아하세요?"


(냉면과 막국수를 주제로 선을 그으며 꾸며낸 냉면녀와 막국수남의 이야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



내일, 위즈덤 작가님은 '향기'와 '냄새'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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