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야기를 썼다. 쓰면서 자꾸 눈물이 났다. 긴 거 같긴 한데 도무지 뺄 게 없었다. 문장만 고쳐서 글 잘 쓰는 선배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한마디. “장면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하는건지 모르겠음”
이 사람 난독증 아니야? 본인이 못 읽으니 이렇게 성의없는 대답을 하는거지. 쳇. 뾰족한 마음으로 채팅창을 닫아버리고 둘째 숙제를 봐줬다. 시각과 시간을 구분하는 문제였다. 시각은 시간의 어떤 한 지점, 시간은 어떤 시각부터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라는 설명을 해줬다.
아이가 시간과 시각을 구분하는 문제를 푸는 동안 내 글을 천천히 읽다가 알았다. ‘시간은 있는데 시각이 없구나.’
내 생의 어느 순간 시각과 시간은 모두 할머니로 채워져 있었다. 이 채움은 절대적으로 나혼자만의 것이기에 글로 풀면 나의 기억을 위한 일기일 뿐 독자가 있는 에세이가 되지 못한다. 채운 시간 사이의 섬세함을 나와 똑같이 느낄 수는 없을테니까.
물론 그 섬세함까지 몰입되는 글도 있긴 하겠지. 그렇게 쓰는 사람을 ‘대가’라고 부른다. 나와 아주 멀리 있는 단어다. 대가처럼 넓은 범위의 몰입을 써낼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작은 범위를 잡아보기로 했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 혼자 아침요가를 했다. 새벽의 집중이 좋았다. 그 기세 그대로 책을 읽다가 아이들을 깨웠다.’
라고 썼다. 1시간정도의 시간이 있는 글이다. 나중에 읽어도 이때의 느낌이 내게 고스란히 살아난다. 오직 내게만.
‘새벽 다섯 시, 요가매트를 폈다. 매트는 부드럽지만 단단히 바닥에 고정됐다. 그 조용한 밀착이 새벽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나도 매트같은 부드러운 단단함을 상상하며 몸을 움직였다.’
라고 쓰면 아침운동하는 그 시각이 시각화된다. 1시간을 잡은 전자가 내게만 살아나는 느낌이라면 매트까는 시각중심으로 잡은 후자는 다른 사람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장면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하는건지 모르겠음”을 비로소 알아 들었다. “너무 긴 시간 대신 특정 시각을 정해 시각화로 고칠 것 ”의 간단 버전이었다. A4 3장이 넘었던 글 하나를 두개로 나누고 나눈 글을 또 시각 기준으로 쳐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니 고정된 한 순간만 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최대로 짧게 잡으면 거의 시각처럼 압축됐다. 압축되면 상대적으로 더 깊이 들여다본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예 쓸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압축된 시간을 들여다보며 할머니 글을 고쳤다.
몇 달 후, 고친 글을 다시 본 선배가 말했다. “전에 비슷한 글 있지 않았나? 그건 별로였는데 이건 뭐 이리 좋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거야?” 라고 했다.
“니 난독증 때문에 깨달음을 얻었거든!” 이라고 하는 대신 “덕분입니다.”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모든 시간을 꼼꼼하게 다 쓰고 싶은 날이 있다. 쓰다보면 내 안에서 해소되고 충만해지는 무언가도 있기에 이런 작업도 꼭 필요하다.
내가 충만해진다고 남도 그러진 않는다. 누군가는 나의 충만과 남의 충만이 교차되게 쓰지만 몹시 확실하게나는 못하겠다. 충만은 내 일기장에 나혼자 하고 시간을 시각까지 깎아 보려고 한다. 충만교차에 비하면 해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