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면 여의도 세계 불꽃 축제를 한다. 축제날은 동작대교부터 원효대교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사람 덩어리가 생긴다. 십몇 년 전, 그 덩어리 속에 나는 잘 모르는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선 보고 두 번째 만난 남자였다.
길석님의 엄포가 있었다. 성.의.있.게. 선 보고 애프터 있으면 세 번까지는 무조건 만나라고. 또 성의 없거나 안 나가면 그날 바로 너네 집 보증금 뺄 거라고. "그 애프터 내가 정하면 안 돼?"라고 물었다간 그 자리에서 보증금을 뺄 기세라 묻지 못했다.
여의도 불꽃 축제 불꽃 하나 터지는데 차 한 대값이 날아간다고 했다. 불꽃놀이가 절정으로 가면 1초에 서너 대씩 차를 버려재낀다. 우주적으로 황홀한 돈지랄이다. 그 황홀함에 신의 완벽한 선물인 가을바람이 더해지면 거대한 사람 덩어리조차 낭만적이다.
'가을바람에 대책없는 뇬'을 몇 년 겪은 내 친구가 신신당부했다. 니 대책없음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나 풍경과 남자를 동일시하면 절대 안 된다고.
당부가 너무 간절했을까. 사람에 끼인 나를 빼내느라, 키가 작은 나를 도와주느라 그 남자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들어 올렸는데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플라스틱 손잡이와 키높이 의자가 인공지능적으로 움직이는 느낌?
그날, 플라스틱이 말을 했다. 이틀 동안 서로가 하나님의 응답인지 기도해보자고. 선 본 첫날부터 말끝마다 주여삼창을 할 분위기임에도 보증금 지키느라 방긋 모드를 유지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라고 하진 않고 상냥하게 네~ 했다.
이틀 기도해서 플라스틱에 감정이 생긴다면 그 기도를 받는 신은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신일 것 같았다. 제발 그가 믿는 신이 나의 신과 같아서 최소한의 배려가 있기를 이라고 기도했다.
그의 신은 성격이 좀 급하셨다. 하루만에 전화가 왔다.
"기도했어요? 어땠어요?"
"(성령의 불이 내려와서 다 태웠다고 할까) 예... 아... 뭐... 어떠셨어요?"
"아니라는 응답을 주셨어요. 아쉽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려고요."
"(역시 나의 신은 배려 깊군요) 그랬군요. 꼭 응답받는 좋은 분 만나세요. 안녕히 계세요."
길석님한테 바로 전화했다.
"엄마, 그쪽에서 아니래. 세 번 안 채워도 되는 거지?"
"넌 차인 게 그리도 신나? 목소리 봐라 아주."
"하나님이 아니랬대. 순종 하는 마음으로 따른대. 나도 순종하려고"
"푸핫. 진짜? 어우, 내가 들은 순종 중 최악이다! 우리 딸 보증금 지킨다고 진짜 참았나봐. 엄마가 미안해"
오늘 잠깐 만난 전도사님이 '순종'에 대해 광분하는 걸 보고 그가 생각났다. 목회자가 순종을 말하면서 광분하면 플라스틱 그의 순종과 맞닿은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순할 순, 좇을 종. 순순히 따르다의 '순종'이 '변종'되면 어디까지 갈까. 전도사님판 순종 이야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