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Sep 14. 2021

쓸데없이 정확한 판단을 할 때 생기는 일

지시대명사가 된 사람

중학교 때부터 친했다. 10대 때는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렀다. 그가 스물이 되자 나는 그에게 야, 어이, 거기 등 지시대명사가 됐다. 초반에는 뭐라고 하다가 그의 일관성에 내가 백기를 든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원샷한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쫌, 씻고 살아. 드러워죽겠네"

"나갈 일 생기면 씻는다고"

"지금도 나온 거잖아"

"너 만나는데도 씻어야 돼?"

"이걸 그냥!"


걔는 담배를 갖고 나가버렸다. 잠시 후 들어오더니 내 옆에 바짝 앉는다.


"꼴초새끼 니 자린 저쪽이거든? 담배냄새 싫어!"


'싫어'와 동시에 내 팔을 끌어당긴 그가 헤드락을 걸었다. 그의 가슴에 코를 박은 채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리며 소리 질렀다.


"나 사흘 동안
머리 안 감았다고.
놓으라고 새끼야!"


담배냄새와 버버리 워크포맨과 살 냄새가 3 : 2 : 1로 배합되어 코를, 아니 얼굴 전체를 휘감았다. 동시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버둥대느라 빨라진 박동이 아니었다. 왜 이런 판단은 쓸데없는 순간에 과하게 정확한 것인가.


정확하긴 하나 들키면 안 된다의 마음으로 우주적 힘을 끌어모아 빠져나왔다. 빠져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조차 최선을 다하기 싫었다. 얘 힘이 더 세서 정말 내가 못 빠져나와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


쿵쿵대는 내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새라 핏대를 높여본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 하니까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오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주책이야.
웬수같은 인간"


지시대명사의 호통 따위. 주책인 건 내 심장박동인데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마주 앉으니 향이 희미해진다. 3 : 2 : 1의 황금비율은 그대로인 거 같다. 희미해진 향이 내 콧구멍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나는 무심한 척 술을 들이켰다. 나를 지시대명사로 부르는 그를 듣는 중에 혼자 삐죽거렸다.


'쳇, 사람을 물건처럼 부르는 게 어딨어. 저 새끼의 과한 허풍이야.'


그래놓고 지시대명사가 나올 때마다 나는 훈풍을 느끼는지. 허풍과 훈풍의 간극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10대에 함께 보낸 짧은 낮과 20대에 술을 푸는 긴 밤이 어떻게 결합되면 이지경이 되는지. 치고 올라오는 수많은 물음표를 구겨 넣으며 소주를 털어 넣는다.


방마다 있는 케이블 티브이를 켰다. 엠넷의 발라드 타임이다. 너가 있어서 내가 살고 죽는단다. 저렇게 요란하게 할 거 뭐 있어, 그냥 이렇게 마주 보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소주병 일렬종대에 하나를 추가한다.


노래는 끊이지 않고 술잔도 끊이지 않는, 어쩌면 흐르는 마음까지 끊이지 않을지 모르는 신촌의 어느 여름밤이 지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룸이 포카리스웨트 아가씨를 때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