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정확한 판단을 할 때 생기는 일
지시대명사가 된 사람
중학교 때부터 친했다. 10대 때는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렀다. 그가 스물이 되자 나는 그에게 야, 어이, 거기 등 지시대명사가 됐다. 초반에는 뭐라고 하다가 그의 일관성에 내가 백기를 든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원샷한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쫌, 씻고 살아. 드러워죽겠네"
"나갈 일 생기면 씻는다고"
"지금도 나온 거잖아"
"너 만나는데도 씻어야 돼?"
"이걸 그냥!"
걔는 담배를 갖고 나가버렸다. 잠시 후 들어오더니 내 옆에 바짝 앉는다.
"꼴초새끼 니 자린 저쪽이거든? 담배냄새 싫어!"
'싫어'와 동시에 내 팔을 끌어당긴 그가 헤드락을 걸었다. 그의 가슴에 코를 박은 채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리며 소리 질렀다.
"나 사흘 동안
머리 안 감았다고.
놓으라고 새끼야!"
담배냄새와 버버리 워크포맨과 살 냄새가 3 : 2 : 1로 배합되어 코를, 아니 얼굴 전체를 휘감았다. 동시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버둥대느라 빨라진 박동이 아니었다. 왜 이런 판단은 쓸데없는 순간에 과하게 정확한 것인가.
정확하긴 하나 들키면 안 된다의 마음으로 우주적 힘을 끌어모아 빠져나왔다. 빠져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조차 최선을 다하기 싫었다. 얘 힘이 더 세서 정말 내가 못 빠져나와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
쿵쿵대는 내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새라 핏대를 높여본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 하니까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오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주책이야.
웬수같은 인간"
지시대명사의 호통 따위. 주책인 건 내 심장박동인데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마주 앉으니 향이 희미해진다. 3 : 2 : 1의 황금비율은 그대로인 거 같다. 희미해진 향이 내 콧구멍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나는 무심한 척 술을 들이켰다. 나를 지시대명사로 부르는 그를 듣는 중에 혼자 삐죽거렸다.
'쳇, 사람을 물건처럼 부르는 게 어딨어. 저 새끼의 과한 허풍이야.'
그래놓고 지시대명사가 나올 때마다 왜 나는 훈풍을 느끼는지. 허풍과 훈풍의 간극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10대에 함께 보낸 짧은 낮과 20대에 술을 푸는 긴 밤이 어떻게 결합되면 이지경이 되는지. 치고 올라오는 수많은 물음표를 구겨 넣으며 소주를 털어 넣는다.
방마다 있는 케이블 티브이를 켰다. 엠넷의 발라드 타임이다. 너가 있어서 내가 살고 죽는단다. 저렇게 요란하게 할 거 뭐 있어, 그냥 이렇게 마주 보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소주병 일렬종대에 하나를 추가한다.
노래는 끊이지 않고 술잔도 끊이지 않는, 어쩌면 흐르는 마음까지 끊이지 않을지 모르는 신촌의 어느 여름밤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