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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Nov 28. 2022

택배가 멈췄다

겨울나기

시어머니 텃밭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숨에 뛰어가기엔 숨이 차다. 매년 조금씩 줄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텃밭의 고정 이미지 평수를 훌쩍 넘어간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밭일에 소질이 있지는 않았을 텐데 그 손을 거친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잘 자라났다. 마트 진열장 위 예쁜 농산물과는 다른 방식이다. 아무리 봐도 예쁘진 않아서다.


자식들 먹일 작물에 쉽게 약칠을 할 수 없다며 기름진 거름을 일일이 비교해서 정성스럽게 뿌리셨다. 약이 없으니 까치와 벌레가 환장하고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끝까지 약칠과 촉진제 투입과 모양 시술을 하지 않았다.


시술받지 않은 가지와 오이는 어떤 건 몽둥이처럼 굵었고 어떤 건 갈고리 모양이었다. 토마토는 동그라미 범주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먼지만 쓱쓱 닦아 한 입 베어 물면 마트 작물에 없는 식감과 향이 있었다. 오이가 뿜는 달큰함은 츤데레 같아서 분명 있는데 없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가지는 그저 양념 맛으로 먹는 줄 알았는데 생가지가 주는 맹맹함은 '은은하게 예쁘다'를 맛으로 보여준다.  


못생긴 가지와 오이와 토마토는 돌아서면 쑥쑥 올라온다며 어머니는 부지런히 택배를 보내셨다.


밭일은 정말 멈출 수 없는 성실함을 요구한다. 비가 적은 여름날은 하루라도 돌보지 않으면 햇빛이 심술을 부린다. 비가 넘치는 여름날 역시 하루라도 돌보지 않으면 흙탕물이 심술을 부린다. 비가 와서, 혹은 안 와서 어머님은 숨 막히는 여름에도 밭을 지켰다. 일찍 뜨는 해를 피하려고 매일 새벽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어머님 집에서 자는 날이라고 해도 감히 새벽을 쫓아 나갈 수 없는 나는 내 식의 효도를 했다. 어머님은 당신이 수확한 작물이 뭔가로 탈피하는 모습을 좋아하셨다. 어머님이 대파 한 단을 뽑아오시면 나는 30분 내내 다진다. 다진 파 큰 봉지 두 개가 나오는데도 어머님은 굳이 내가 다 가져가라 하신다. 낼모레면 또 이만큼 뽑아오신다는 게 그 이유다.


여름 토마토가 계속 올 때는 토마토 카레와 토마토 수프를 계속 끓여댔다. 약 안 먹은 토마토 단맛이 카레 풍미를 그렇게 올리는 줄 몰랐다. 내가 만들고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만들 때마다 과정 샷을 어머님께 보내고 비워진 냄비를 또 찍어 보냈다. 손주가 입을 왕 벌리고 그것들을 먹는 모습을 찍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11월 초에는 무가 쌀 푸대로 왔다. 귀한 가을무를 하나라도 버릴 수 없기에 나는 비장해졌다. 양이 많으면 필망 하는 똥손이라 무 서너 개씩 깍두기를 몇 번 담갔다. 담을 때마다 과정 샷을 찍어서 어머님께 보낸다. 사진을 보며 씨익 웃으실 어머님 모습을 상상한다.  


어머님 텃밭은 생명 근원을 향한 애정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에게 아낌없이 쏟았던 애정을 이제는 텃밭에 쏟는다. 매번 힘들다 하시면서도 놓지 못하시는 건 어머니 방식의 애정이다. 힘들지언정 다 내어주면서 본인이 채워지는 삶, 익숙한 일을 능숙하게 하는 쾌감이 고된 노동을 잊게 하나보다.


요행이 칭송받는 시대다. 요행이기에 앞선 자가 수시로 바뀌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 정직한 땀으로 가꾼 결과를 내 손으로 만질 수 있음은 그 어떤 방패보다 단단하게 나를 지킨다. 앞선 자의 허세가 부럽지 않다.


무를 끝으로 택배가 멈췄다. 어머님 텃밭도 긴 휴식기에 들어간다. 대파와 김치와 무는 냉장고에 가득하다. 땅이 키운 생명이 다시 나와 아이들 생명을 키운다. 생명을 키우는 그 성실함을 배울 수 있다면 수시로 흔드는 각종 불안에서도 얼마간은 자유롭다. 성실하게 쌓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멈춘 택배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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