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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15. 2023

기억에 없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법

창세기

종종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을 보며 사진에 없는 앞뒤 풍경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 표정이 풍부해진다. 그 풍부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에 나도 모르는 새 이야기는 더 행복한, 더 사랑한 방향으로 편집된다. 



창세기는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가 기록했다. 본인이 모르는 일이지만 신이 주는 영감으로 썼다. 굳이 왜? 했을 때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나를 떠올린다. 기억할 수 없지만 듣고 상상하는 기쁨, 아이가 진상짓을 했어도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는 기쁨이다.



창세기의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발뺌하다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 가인은 저주 입은 본인을 다른 사람들이 죽일거라며 공포에 떤다.



아담, 하와, 가인, 아벨만 있는 시대에 '사람들'이 있을 수 있냐며 혹자는 성경은 처음부터 오류라고 지적한다. 이야기의 편집성을 모르는 주장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에덴 시절은 출산 고통이 없으니 10개월 임신기간도 없겠지. 그러니 자식들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출산과 양육 부담이 없으면 많이 낳고 싶은 게 인간 본능이다. 출애굽 이전시대까지는 근친혼은 당연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세팅됐을 것이다.



가인, 아벨, 셋만 기록한 건 그들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 ㅡ 에덴은 폐쇄됐어도 사랑이 폐쇄되진 않는다 ㅡ 를 전하고 싶어서겠다. 땅이 어떤 소산도 내지 않을거라는 저주를 받은 가인마저도 제 수명을 다 누렸으니 말이다. 



실제로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로 그들의 구체적 기록은 없다. 대신 셋이 '낳고 낳고'를 거듭하며 노아가 등장한다. 창세기의 기록다운 기록은 여기서 두 번째를 시작한다.



기록되지 않은 행간을 상상하며 읽다 보면 마치 감독의 비공개 메이킹 필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이건 왜 확대됐을까 혹은 왜 축소, 삭제 됐을까를 퍼즐 끼우듯 맞춰본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학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저 내 아이들이 그러듯 내 상상 안에서 입체적인 마음을 그리면 그만이다.



사랑으로, 행복으로 편집한다는 진부한 표현이 만드는 단단함을 본다. 그 단단함이 몇 천년을 지나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성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단단함에 기대보고자 오늘도 성경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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