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Sep 05. 2024

이혼이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라 해도

드디어 이혼_5

단정한 머리 수건에 활기차 보이는 얼굴, 분명 낯익지만 세화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나 진숙이야. D여고 1학년 3반 최진숙, 기억 안나?"


그제야 기억났다. 요즘말로 인싸였던 최진숙,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세화와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고등학교 때는 친하게 지낸 기억이 없다. 그랬어도 시간 바뀐 첫 근무날에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나쁘진 않다.


"아, 미안해. 이제 생각났어.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너는 어째 고등학교 때 분위기 그대로다. 살도 하나도 안 찌고."


진숙은 고등학교 때처럼 시원시원하게 말을 이어갔다.


진숙은 새벽근무 한지 3년이 넘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아예 새벽근무만 해서 세화랑 마주칠 일이 없던 모양이다. 병원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집에 갔다가 4시부터는 옆 동 사는 4살 아이 하원 도우미를 한다나. 하원 도우미는 워킹맘 아이들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봐주는 일이다.


아이 엄마가 퇴근하면 한 시간 운동하고 9시에 자면 딱 새벽근무 시간이라고 했다. 진숙은 주5일 근무라고 했다. 세화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우와, 내가 원하는 삶인데? 너무 완벽하잖아!"


"그치? 내가 봐도 그래. 이게 다 이혼으로 가능한 일이지. 호홍~"


호탕하게 웃는 진숙 앞에서 세화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만난 지 5분도 안 되어서 이혼을 밝히는 옛날 친구에게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이혼이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세화는 그 세상에서 한참 멀어진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옛날 동창만큼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화의 그런 표정을 읽은 진숙이 말했다.


"괜찮아. 세상이 바뀌어서 이혼이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라고 해도 우리 세대에겐 좀 어려운 단어야. 그치? 그걸 알아서 나도 그냥 미리 말하는 편이야. 애초에 오해 싹을 자르려고. 그러니까 할말 고르지 않아도 돼."


진숙은 세화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했다. 세화는 그렇게 말해주는 진숙이 오히려 고마웠다.


"어, 너 고등학교 때도 똑똑하더니 여전하구나. 맞아. 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어. 근데 말 나온 김에 그 이혼 이야기 더 해 줄 수 있어?"


그때 응급실 콜이 울렸다. 새벽 교통사고가 크게 난 것 같던데 그 뒷수습이 거의 끝난 모양이다. 응급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면 세화 같은 청소 도우미들의 수습이 필요했다.


"가면서 얘기하자."


진숙은 5년 전에 이혼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라 양육권 다툼까지는 없었으나 재산분할에서 협의가 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소송을 진행했다.


남들처럼 고상하고 우아하게 이혼하고 싶었지만 진숙에게 허락된 일은 아니었다. 똥을 굳이 밟아야 하나? 더러운 거 다 너 가져라! 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곧바로 떨쳐버렸다.


이혼 후의 생활도 현실이다. 결혼 생활 18년동안 파트타임 일을 쉬지 않고 한 게 아까워서라도 꼭 받아내야 했다.


피가 흥건한 대걸레를 빨며 진숙이 말을 이었다.


"이혼은 둘이 하는데 소송은 7명이 하더라니까? 조정기일에 당사자 2명, 조정 도와주는 조정위원 2명, 소송대리인 각 1명, 판사까지 오니까 7명이잖아. 뭐 이리 복잡한가 싶어서 수시로 관두고 싶었지만 재산분할 하나만 보고 꿋꿋하게 버텼지."


"힘들었겠다."


"힘들었지. 근데 말야. 그렇게 버텨보니까 응급실에 저렇게 피가 낭자해도, 굳은 피가 안 닦여도 하나도 안 힘들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고 나니까 다른 일은 다 쉬워지더라? 세상에 필요없는 경험 없다는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세화는 진숙이 부러웠지만 어쩐지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다른 말을 고르고 있는데 진숙이 문득 제안을 한다.





 








 

이전 04화 그럼 내 아침은 누가 차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