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혼_6
"다음주에 동창회 있는데 가볼래? 다들 반가워할텐데."
고등학교 때도 친구가 별로 없던 세화는 선뜻 가겠노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진숙이 또 읽었다.
"친한 친구가 있든 없든 간에 시간 흐르고 보는 친구들은 그저 재밌더라. 걱정말고 나와. 나랑 같이 가자."
“나 요새 신생아 육아로 돌아버린다.”
“응? 늦둥이? 청춘이네 청춘.”
“내가 마리아냐? 손도 안 잡았는데 애를 낳게?”
나이 오십은 어색함을 지우는 훌륭한 도구였다. 세화도 별 말 없이 동창회에 금방 동화됐다. 그러다 신아 이야기에 다들 집중됐다.
“늦둥이 아님 뭐야?”
"우리 남편 퇴직했거든. 그러더니 하루 종일 나만 찾아. 신생아가 나 찾는 건 이쁘기라도 하지. 이건 정말 미치고 팔딱 뛴다."
“니 남편 밥 할 줄 알아?”
어디선가 질문이 날아온다.
“그게 문제야 그게. 이 남자가 밥도 못하더라고. 나 평생 압력솥만 썼거든. 이 남자는 압력솥이 무섭다나.
그래서 전기밥솥을 샀는데 지금도 나 없으면 햇반을 사오신다. 미쳐버려.”
신아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선영이가 고등학교 때처럼 안경을 치켜 올리며 핸드폰에서 뭔가를 검색하더니 보여준다.
“이거 봐. 퇴직 후 여가시간의 반 이상을 아내와 보내고 싶다는 남자는 전체의 60프로가 넘는대. 여자는 전체의 30프로도 안 된대. 갭이 너무 크지 않아?”
선영이 단톡방에 해당 링크를 뿌린다. 다들 핸드폰에 코를 박고 어머, 그러네, 하면서 맞장구다.
“야, 나는 30대 중반에 싸워가면서 밥, 김치찌개, 멸치볶음 이거 세 개 가르치는데 6개월 걸렸어. 그땐 앓느니 죽지 하고 내가 할까? 했는데 이 세가지는 마지노선이다,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가르쳤거든? 그걸 손에 붙여놓으니 어묵탕, 어묵볶음을 스스로 하더라?”
신아 짝궁이었던 선영이가 맥주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신아는 장화신은 고양이의 애절한 눈빛이 되어 선영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선영이가 이시대 진정한 천재네. 맞아. 30대에 그걸 했어야 돼. 나 지난달부터 가사도우미 나가. 도우미 끝나고 도서관에서 책 보다가 8시에 집에 들어와. 남편이 밥 차리는 걸 배울 생각을 안하니 내가 강수를 두는 거지.”
“그럼 니 저녁은? 남편은 굶지 않아?”
누군가가 또 물었다. 세화도 궁금한 참이었다.
“도서관에 4천원짜리 백반 정식이 있어. 난 그거 먹지. 남편은 굶다가, 라면 먹다가 그러더라. 가르치진 못하겠으니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
"그러고보면 진숙이가 위너야. 지 밥만 챙기면 되잖아. 나도 요새 같아서는 진짜 이혼하고 싶다."
신생아로 운을 뗀 신아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 핸드폰에 코를 박더니 단톡방에 링크를 뿌렸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이야. 3개월동안 교육받으면 혼자 사는 할머니 집 가서 말 동무 좀 해주고 청소, 반찬 이런 거 하거든. 하루 4시간만 하면 되니까 아침에 나갈 데 있어서 좋아. 하루에 두 집 뛰는 사람도 있더라.”
“하긴, 혼자 사는 할머니는 살림도 얼마 없을 테니 괜찮겠다.”
“야, 그것도 할머니 나름이지. 살림 쌓아놓고 사는 할머니도 많아. 복불복이야.”
“복불복이어도 퇴직한 남편이랑 아침부터 둘이 얼굴 보고 있느니 할머니 복불복에 기대볼래.”
“맞다맞다, 그건 돈이라도 나오니까.”
여자들의 수다가 끊임없이 흐른다. 그 속에서 세화는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막연했던 퇴직이 현실감 있게 훅 다가온다.
지창의 정년퇴직까지 3년, 금방 다가올 시간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늦은 저녁에 돌아오던 지창은 밤 10시에 퇴근했는데 새벽3시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피곤한 얼굴로도 세화를 보면 웃으며 "오늘도 고생 많았지?"라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런 살가운 시절이 있긴 있었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데 뭐가 이렇게 지창을 변하게 했을까. 지창이 이렇게 변해버린 데에 내 책임도 있는걸까? 세화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왁자지껄한 동창회 수다 속에서 뚝 떨어진 무인도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