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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Sep 19. 2024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이름 하나

드디어 이혼_8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세화 친정엄마 영숙은 매일 같은 시간에 수영장을 찾았다.


여든의 나이답지 않은 활력은 수영이 준 선물이었다. 물속에서의 무중력 감각은 영숙을 자유롭게 했고, 마음 깊은 곳까지 맑아지게 만들었다.


영숙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수영장을 나섰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그녀의 숨을 가늘게 만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새벽수영은 그녀에게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수영 후의 상쾌함이 몸을 감쌌다. 영숙은 아직 잠들지 않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세상의 고요함을 만끽했다.


건널목 앞에 다다랐을 때, 영숙은 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멈춰 섰다. 고요한 새벽, 적막한 거리에 그녀의 숨소리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눈앞의 신호등이 깜빡이며 초록색으로 변하기를 기다리던 그 순간, 불현듯 어딘가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불길한 소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영숙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멀리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헤드라이트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는 새벽의 고요를 짓밟으며 점점 커져갔다. 그 차는 도로를 벗어나 거침없이 인도로 파고들었다.


영숙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수영장의 찬물 속에서 느꼈던 평온함이 전혀 다른 차원의 냉기로 변해 그녀를 덮쳤다.


이어진 충격은 거칠고도 무자비했다. 영숙의 시야가 뒤틀리며 하늘과 땅이 한순간 뒤바뀌었다. 어둠 속에서 세상이 한 바퀴 돌고,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고요함이 다시금 찾아왔다. 찢어진 타이어 소리와 함께 공기가 흔들리던 순간은 이제 먼 기억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영숙은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점점 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새벽하늘의 색. 검푸른 새벽의 잔해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고요한 새벽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갑게 그 자리를 지켰다.


충돌 후 정적 속에서 영숙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으려 했다. 어둠 속에서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이름 하나, 세화를 부르고 싶었다.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면서, 영숙은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조각들이 반짝이며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빛이 점차 사라지는 순간, 영숙은 고요한 어둠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어갔다.


긴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 늦게 도착한 경고음처럼, 이미 끝난 일의 잔재만을 남긴 채 울려 퍼졌다.


영숙은 이미 그 고요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 속에는 며칠 전까지 저녁식탁을 마주하던 세화의 환한 미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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