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혼_11
세화는 친정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코끝을 스치는 낯익은 향기에 잠시 멈춰섰다. 친정엄마 영숙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영숙의 집은 그저 오래된 24평 아파트가 아닌, 마치 생명을 지닌 존재 같았다. 집이 세화의 움직임에 따라 고요하게 숨 쉬고 있었다. 빛 바랜 벽지마저 단아했고 창문을 타고 흐르는 햇살은 오래된 기억처럼 부드럽게 쌓였다.
거실로 발을 들여놓자, 빈자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소파 위에가지런히 놓인 쿠션은 틀림없이 같은 각도로 놓여 있었고, 오래된 스탠드 조명은 마치 항상 그 자리를 지키던 병사처럼 우뚝 서 있었다.
영숙은 평생 깔끔함을 미덕으로 삼았지만, 이제 그 깔끔함은 존재감을 잃고 말았다. 세화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지만 그 숨에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 듯 했다.
영숙의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계절 흐름을 그대로 보여줬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옷들로 축약되어 있었다.
영숙은 계절마다 딱 맞는 옷을 꺼내 입곤 했다. 옷장의 한쪽에는 봄과 여름을 위한 옅은 파스텔톤의 셔츠와 스커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옷감은 부드럽고 가벼워서, 손끝에 닿는 촉감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오래도록 좋은 소재를 고집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연한 민트색 리넨 셔츠와 하늘색 면 스커트가 먼저 빛을 발했다.
가을과 겨울이 오면 따뜻한 느낌의 연베이지색 니트와 크림색 코트가 자리를 채웠다. 옷은 많지 않았지만, 그 하나하나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그녀의 생활을 반영했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무게의 삶, 그 옷들은 영숙이 계절 변화를 얼마나 정교하게 예측하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냈다. 몇 벌 되지 않는 옷이 영숙의 삶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었다.
신발장에서는 가벼운 가죽 향이 풍겼다. 부츠와 슬리퍼, 샌들그리고 운동화. 여섯 켤레에 불과한 신발들이 한 줄로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영숙이 매일 아침 신발을 신기 전에 허리를 굽혀 하나씩 손질하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하나하나의 신발은 각기 다른 계절과 장소에서 그녀와 함께한 시간의 단면들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세화는 시간이 멈춘 정적 속에서 묵직한 공허를 느꼈다. 깨끗하게 정돈된 조리 도구들은 마치 오래된 악기처럼 광택이 났다.
세월이 흘렀지만 도구들은 여전히 예리했고, 영숙의 손길이 닿은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스텐 집게는 세화가 중학생 때 시장에서 샀던 기억이 났다. 서랍 속의 칼과 숟가락, 그릇들. 그곳엔 더 이상 '묵은 살림'이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아무것도 과하지 않았다.
세화는 그 공간 속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삶을 간소화하고, 필요한 것만을 남기고자 했는지를 보았다. 단순함 속에 담긴 깊이, 그 속에 숨겨진 절제의 미학이었다.
세화의 손끝이 주방의 차가운 금속 표면을 스치자, 오래된 메탈의 냉기가 순간적으로 감각을 깨웠다. 그 차가움은 어느새 따뜻한 기억으로 스며들었다. 세화는 그 기억을 잡고 주저앉아 오래 흐느꼈다.
얼마가 지났을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올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세화는 대답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몇 초 후 이번에는 신경질적으로 현관문을 탕탕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화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인터폰 화면을 봤다. 지창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지창이 씩씩대며 들어왔다.
"집에 있으면서 뭐하느라 그리 꾸물거려. 사람 문밖에 세워놓는 것도 취미야?"
"온다는 말 없었잖아요. 놀라서 잠깐 멈칫했을 뿐이에요."
"내가 뭐 못 올 곳 왔나."
지창은 헛기침을 하며 들어오더니 대놓고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히야, 장모님 진짜 깔끔하셔. 집 보러 오는 사람들은 같은 집이라 해도 이렇게 정리된 집을 좋아하지. 암, 그렇고 말고."
집이 쩌렁쩌렁 울리게 혼잣말을 한다. 아니, 이정도면 혼잣말이 아니지.
"집 보러 오는 사람이라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