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Aug 08. 2020

나를 나답게 하는 것

여름에만 통하는 세 가지

우리 집 아이들의 1학기 학교생활은 달랑 3개월, 주 1회 4시간이 전부다.


학원 일정도 없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인생 최대의 한량치를 갱신하며 살고 있다.      


1학년과 4학년이 종일 붙어 있으면 왜 모두 미취학 어린이가 될까. 아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나만의 방’을 각자 만들어줬는데 왜 꼭 안방 침대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는지. 성인 남자가 누워도 넉넉한 리클라이너 소파에서 굳이 옆으로 눕겠다며 싸우는지.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이 어찌나 규칙적인지.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그믄흐르’라고 복화술로 말한다. 알아서 끝내주면 좋겠지만 애들은 더 싸우면서 나의 한계를 가볍게 넘는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 너희들 같이 있지 마! 두 시간 동안 방에서 나오지 마!”      


삼국지의 관우 목소리가 이만큼 우렁찼을까.         




며칠 전, 단톡 방에서 장문의 톡이 왔다. 아이에게 짜증을 낸 게 후회된다. 짜증 내는 횟수가 많아진다. 뭔가 조치가 필요하니 도와달라.... 의 글이었다.  

   

 누군가의 답이 올라왔다. 저.. 에어컨 켜셨나요? 불쾌지수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에어컨은 중요합니다. 더불어 달달한 간식도 중요합니다.’라고 답을 달았다.


아침마다 캡슐 커피를 내려마셨다. 어느 날인가부터 쌓이는 알루미늄이 부담스러워서 더 이상 사지 않았다. 원두 1kg을 윙윙 갈아서 비닐로 꽁꽁 동여매 찬장 한쪽에 넣었다. 아무리 동여맸다 한들 찬장은 진한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이 작은 공간이 나의 안전지대다.      


아침마다 드리퍼에 수북하게 커피 한 스푼을 담고 티 보틀에 80도까지만 물을 끓여 조심조심 붓는다. 드리퍼 가장자리에 살짝 물을 부으면 커피 가루가 앞구르기 하듯 뒤집어지며 봉긋 솟아오른다. 둘째가 화장실 뒤처리 후 확인해 달라며 엉덩이를 들이미는 그 모양새다. 이 엉덩이를 본 날은 야매 드립에 나름 성공한 날이다. 쭈르륵, 똑, 똑.. 세상 느긋하게 커피가 내려질 동안 전날 씻어둔 쌀을 헹궈서 압력솥에 넣고 불을 켠다. 여전히 똑, 똑, 제 일에 충실한 커피를 확인하고 현관 앞의 신문을 가져온다. 신문에 배인 아침 냄새가 커피 향을 마중 나온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면서(=홀로 조용함을 누릴 시간이 없으면서) 단 간식이 필요해졌다. 각종 초콜릿 과자를 두루 거쳐 지금은 바닐라 초코 아이스 와플에 정착했다. 와플 한 입을 입속에 두고 따뜻한 커피를 머금는다. 그러면 와플 사이의 아이스크림이 미끄러지듯 녹고 단단한 초코만 남는다. 그때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면 초코도 제 형체를 잃고 혀에 얌전히 눕는다.       

티 보틀, 드리퍼, 초코 바닐라 와플


장마가 시작되면서 와플을 꺼내기 전에 에어컨 제습을 먼저 튼다. 이걸 해놓지 않으면 커피 엉덩이가 보이든 말든, 초코가 눕든 말든 괜히 짜증이 난다. 시원한 공기에 더해진 달디 단 간식은 온화한 엄마를 데려온다. 아이들의 규칙적인 싸움에 별소리 없이 우아하게 넘어간 날은 이 모든 세팅이 갖춰진 때였다.     


성실은 체력에서 나오고 온화는 통장잔고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체력은 그렇다 쳐도 '엄마의 온화함'은 통장 잔고로 되지 않는다. 나보다 천 배 많은 잔고를 가진 듯한 드라마 속 수많은 사모님들도 자식을 쥐 잡듯 잡지 않는가!


 


아이들에게 소리 지른 날은 나의 인격과 소양과 배움과 기타 등등 모든 것을 의심하며 자책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상처 받은 내면 아이가 있어서 약한 아이들에게 그 화를 푸는 걸까 식의 고민도 했다.      

 

부모교육 강의를 찾아보고 육아서를 뒤졌다. 강의자와 저자는 천상계  사람들 같아서 더 괴로워졌다. 나는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인가.      

 

 아이들과 몇 달을 엉겨 붙어 지내면서 내게 빙의하는 관우를 막는 방법은 간단하게도 커피, 초코, (여름 되면서) 에어컨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은 복잡 미묘한 존재 아니었나. 나는 왜 이리 단순한가. 싶었지만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는 엄마가 더 중요했다.      


커피+초코+에어컨의 간단한 조합으로 온화한 엄마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것도 나다운 모습이라고 우겨본다.





 이 조합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다른말로는 '먹으려고' 운동한다. 어제는 20kg부터 35kg까지 단계별로 데드리프트 6세트를 했다. 트레이드 밀에서는 30분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의무감으로 시작된 운동이지만 끝낸 순간만큼은 자기 긍정이 치솟는다.


뽀송한 아침과 커피의 조합, 그리고 운동은 내가 원하는 나다움을 유지할 힘을 준다. 아침부터 아이들과 싸우면 내 안의 고요가 깨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이 힘으로 읽고, 쓰고, 살림하고의 패턴을 이어간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들을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쉬운 것들로 채우고 싶다.


 나중에 아이들이 나를 기억할 때 엄마는 늘 우리에게 온화했지,  본인의 세계를 가꾸며 하루를 채웠어, 몸도 마음도 꽤 단단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라고 말하면 좋겠다.


그 모습이 진짜 나다운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커피를 내리고, 냉장고를 채우고,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 든다.


#나도_작가다


작가의 이전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