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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07. 2020

애국가가 나를 밀어버렸다

너는 헌다면 혀

애미야,
은영이 세 살 까지
내가 키워 줄 테니
넌 출근해라


쉰 한 살 젊은 할머니와 한 달 된 신생아가 만났다. 신생아가 중학생이 됐을 때 할머니는 큰집으로 가셨고 중학생이 스물 남짓 아가씨가 됐을 때 다시 오셨다.


“할머니, 이것 좀 봐. 문자를 받았는데 <너는 좀 문안하게 넘어가도 될 일에 예민해서 연애를 못할 거 같아> 이건 보낸 사람이 바보 아냐? 문안이라니. 나한테 문안 올거야? 내가 연애를 하든말든. 할머니 듣고 있어? 이 문자 진짜 재수없지 않아?"

    

할머니는 10년 전보다 훨씬 탁해진 눈동자를 들어 나를 가만히 보신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거 같다. 같이 사는 13년 동안 돌림노래처럼 끝나지 않던 이야기다.      

“우리 강아지,
너 어릴 때 어땠는지 알아?
동희 알지? 목욕탕 옆 2층집 머스마.
어찌나 드센지 몰러.
깡패도 그런 깡패가 없어.

안 그래도 비리비리한 니가
동희한테 을매나 만만했것냐.
나도 속상해서 널 가르쳤지.

은영아, 동희가 막대기로 또 찌르면
동희 얼굴을 이렇게 확 긁어버려. 알았지?

아휴. 그 때 니 얼굴을 니가 봐야 돼.
요 눈도 똥글, 입도 똥그랗게 앙다물고
나를 빤히 보는데 대답을 안 혀.
니가 동희 무서워하니까
가르치면서도 기대 안했어.

근디 해내더라.
동네에 소문이 다 났어.
길가 집 은영이가 동희를 이겼다고.
동희 엄마? 지 새끼 하고 다닌 짓이 있는디 뭐라혀.
내 속이 어찌나 시원한지.
난 그때 알았어야.

너는 헌다면 해"

동희는 할머니에게 녹음테이프다. 모든 행동이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이 테이프가 돌아갈 동안만은 쉰 한 살 젊은 할머니가 된다.


동희가 지금 내 연애 이야기와 상관이 있는지, 내가 까다로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할머니 메시지는 늘 하나다. 너는 헌다면 혀.      


동희? 당연히 모른다. 나 서너 살 때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도 13년 동안 들으니 동희 얼굴을 긁어버리는 내가 보이는 듯하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가보다!     

 

응원만 보내는 할머니였다. 그 응원 안에서 나는 천하무적이 되고 있었다.


애국가가 날 밀어버리기 전까지는. 

   



7살 후반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지겨운 유치원을 관두고 찾은 돌파구였다. 매일 똑같은 걸 하는 유치원에 비해 피아노 학원은 훨씬 재미있었다.


2학년이 되자 집에 피아노도 생겼다. 집에서도 조금씩 뚱땅거렸다. 3학년의 어느 날, 할머니가 물었다.     


“애국가 칠 수 있어?”

“애국가? 모르겠는데? 악보 없잖아”


“악보 있으면 쳐? 찬송가 악보는 많어. 할미가 골라주는 거 쳐봐”

“학원에서 배워야지”


“안 배운 악보는 못 쳐? 그럼 모든 악보를 다 배워야 혀? 말도 안 되야. 비슷허면 안 배워도 혼자 보고 치는 거 아녀?”     

할머니 질문은 번개처럼 머리를 뚫고 빛으로 박혀버렸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평생 내 편이 멀어진 것 같았다. 오래된 2층 단독주택, 우풍 심하던 높은 천정과 일거리 넘치던 마당이 일시에 숨을 죽이고 나와 할머니를 지켜봤다. 익숙했던 모든 것은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며 압박을 만들었다. 내가 악보를 읽어내지 못하면 이 공간에 깔려도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겠지.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너는 헌다면 혀.
아직 안 해 봐서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조차
모르는 거여.
    일단 혀봐.     


할머니의 오래된 믿음이 확실한 목소리가 되어 내 귀에 자리잡았다. 익숙한 공간에서의 압박은 나와 할머니 둘만 있으니 주술처럼 비밀스러웠으나 색채는 강렬했다. 그날부터 ‘배우지 않은’ 악보탐닉이 시작됐으니까.      


우선 교과서 뒤의 애국가를 봤다. 오후 내내 연습해서 그날 저녁 퇴근한 엄마까지 앉혀놓고 오프닝을 열었다. 

     

“나 애국가 학원에서 안 배웠는데 칠 줄 알아!”      


다 들은 엄마와 할머니는 또다시 동희를 소환해서 ‘한다면 하는’ 세 살 은영이를 불러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찬송가 1장부터 도장 깨기 하듯 격파했다. 물론 임시표가 너무 많은 건 할머니 결제 후 사면권을 얻었다.     


“할머니 이거 봐. 이게 내가 학원에서 배우는 악보거든. 나는 샵(#)이나 플랫(b) 3개까지는 배웠는데 이 찬송가는 4개야. 이건 못하는 거야”     


원리를 알고 있으니 하려면 할 수도 있었을 거다. 악보 까막눈인 할머니를 굳이 앉혀놓고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건 소심한 반항이었다. 압박을 압박이라 설명할 수 없는 열 살 꼬맹이의 최선이라 치자.   




이젠 멜로디를 아는 찬송가라면 악보 없이도 피아노 반주를 한다. 같은 곡이라도 샵이나 플랫을 한 개 붙여서 칠 수도, 다섯 개를 붙여서 칠 수도 있다.     

  

‘할머니, 나 이제 할머니가 어떤 찬송가 불러도 악보 찾느라 허둥거릴 일 없이 바로 칠 수 있는데, 이걸 못 보여줬네. <너는 헌다면 혀>의 주술에 제대로 걸렸나봐.’      


헤드폰을 끼고 전자 피아노 전원을 켰다. 할머니가 좋아했던 찬송가를 낮은 음으로 바꿔서 읊조리듯 가만히 불러본다. 달이 없는 하늘에 빛 잃은 별이 껌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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