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Nov 11. 2020

친구 중의 친구를 아십니까

연대 연대 연대 연대

 당신은 ‘가장 좋은 친구’라는 질문에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는지? 나부터 말하면 모르겠다. 원래부터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죽고 못 사는 단짝이 있긴 있던 거 같은데 출산과 육아라는 거대한 강을 건너면서 잊혔다.


그 정도로 시들어진 우정이면 원래부터 별로였던 거 아니냐고 묻지 않으시길.


당신도 6년 꼬박 남의 똥꼬와 세 끼와, 각종 병치레와, 그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한글 읽기 등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변치 않는 우정 따위는 분명 육아를 안 해본 자가 만든 말임을 확신할 거다.  





이유 없이 문득 맥주 한잔 하고 싶을 때 불러낼 가까운 친구가 여전히 없다. 동네 친구는 있지만 아직 돌봄 노동이 끝나지 않은지라 불쑥 불러내긴 어렵다. 나 역시 그러니 불만일 것도 없다. 이 생활이 오래되니 별로 간절해지지도 않다. 이래서 혼술이 느는 걸 수도.

    

앞글(의지는 쓰레기)에서 말한 랜선 공동체를 통해 이런 재미없는 생활에 친구가 생겼다. 이름마저 우아한 <글 친구>. 그녀와 나는 직접 만난 적은 없고 랜선으로 얼굴을 한 번 본 적은 있다. 대신 그녀의 글은 그녀의 얼굴을 본 시간보다 열 배는 더 오래 봤다. 그녀와 나는 우연히 글쓰기를 같이 시작했고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서 서로의 ‘쌔 눈’이 되어주기로 했다. ‘쌔 눈’이란 내 글을 처음 보는 눈을 뜻한다.      


글을 쓰다 보면 퇴고하느라 하도 읽어대서 헌 눈을 가진다. 일단 헌 눈이 되어버리면 글의 오류가 잘 안 보인다. 작가들은 언제 읽어도 ‘쌔 눈’을 장착한다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늘 ‘쌔 눈’이 되는지 모르겠다.


계속 모를 수 없어서 글 친구에게 ‘쌔 눈’을 빌린다.(문법으로는 ‘새 눈’이겠지만 느낌이 확 죽어서 그냥 ‘쌔 눈’ 이라고 쓴다. 물론 이 단어가 진짜 있는 단어인지 나도 모른다) 나의 글들은(지금 쓰는 이 글 말고. 이건 나의 헌 눈만 본 글이다) 그녀의 ‘쌔 눈’ 덕을 아주 많이 본다.          




책을 낸 저자들은 흔히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아직 책을 내보지 못한 나는 ‘아무리 그래도 자식만 할까’ 싶다. 난임과 난산을 모두 지나온 자의 자기 확신쯤이라 해두자. 글 친구와 글을 나누면서도 당연히 글이 자식 같진 않았다.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건 자식과 징글맞게 똑같지만 글을 못 쓰는 건 내 능력치 부족이라는 확실한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할 수 있는 거, 해달라는 거 다 해줘도 내 맘대로 안 되는 진짜 자식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내 글도 이럴 진데 글 친구의 글은 언감생심 자식이 될 수 없다. 그저 내 글이 아니니 신선했고 주인이 못 찾는 오류를 찾아낼 때 어쩐지 내가 멋있어 보였다.


그녀가 찾아주는 내 글의 오류를 기대하면서 나 역시 좀 더 꼼꼼한 사람이 됐다. 꼼꼼이라는 단어와 내가 약간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그녀 덕에 처음 해본다. 그것도 마흔 훌쩍 넘어서!! 그녀는 준 줄도 모르는, 그녀에게 받은 선물이다.      


이 모든 걸 떠나 내가 가벼울 수 있는 이유는 글 친구의 글에 대해 나는 제삼자라는 사실이다. 내 깜냥만큼 합류하고 적당히 빠질 수 있는 자유. 덜렁이 소릴 듣던 나도 어쩌면 멋있고, 어쩌면 꼼꼼할지 모른다는 찰나의 착각. 이 자유와 착각은 그녀의 글에 쏟은 시간 이상의 보상이었다. 이토록 매력적인 보상이라니!     


친구 중의 친구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좀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친구는 확실히 알 것 같다. 같이 글을 쓰는 사람, 아이를 키우느라 시간이 많아도 많지 않은 사람, 구구절절 사정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나와 비슷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 그 와중에 꾸역꾸역 써서 새벽이든, 오밤중이든 톡으로 전송하는 사람, 상대방의 톡을 보면 어떻게 하든 한글을 켜서 파란색으로 의견을 써주는 약속한 적 없는 약속(절대로 톡으로 하지 않는다!)을 지키는 사람.      


싱글일 때처럼 일상을 공유하는 시시콜콜함은 없지만 지금의 내가 누릴 수 있는 친구 중의 친구다. 이 글을 쓰며 내게 닿는 가을밤의 바람이 그녀에게도 닿길. 그 청량함으로 힘을 내서 다음 편을 쓰길. 그래서 내가 내일 아침 밥하느라 허둥대는 그 시간에(그녀의 패턴으로 봐서는 나처럼 아침에 허둥지둥하는 것 같지 않다) 요정처럼 ‘반짝’ 하며 메시지 창을 울려주길.      

가정 주부가 계속 쓰려면  또 뭐가 필요할까. 다음 꼭지로 고고~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황태입니다(아님 백태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