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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17.

Pre-sessional이 결정되고 나니 학기가 시작되는 7월까지 돈을 벌어야 했다. Pre-sessional 과정을 포함하여 대학원 비용은 일단 해결되었지만, 생활비를 미리 모아두지 않으면 학업에 지장이 있을 터였다. 인터넷을 통해 채용공고를 확인해보았지만 대학원 일정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집 근처에서 단기간으로 가볍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맥도날드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어학연수 당시 친구들은 이미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일을 그만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리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맥도날드에서 근무하게 되면 동양인들은 분명 주말이나 심야에만 근무하게 될 것인데, 그런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런던 생활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영어도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도 피하고 싶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던 것 같다.      

집 건너편에 ‘COSTA’라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지나만 다닐 뿐 전혀 이용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커피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무심코 커피숍을 지나는 길에 커피숍 외부의 테이블을 닦고 있는 아는 누나를 만났다. 일전에 같은 학원에 다닌 적이 있어 일면식만 있는 사이였지만 오랜만에 만났던 터라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내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누나는 이곳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했다. 순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누가 봐도 맥도날드보다는 커피숍이 더 깔끔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승낙을 하기도 전에 누나는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자신도 이곳에서 일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침 다른 일이 생겨 이곳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대타를 구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만일 내가 자기 대신 일을 해주면 자기는 마음 편하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나로서는 덕분에 좋은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이력서를 들고 커피숍을 찾아갔다. 당시에 '수(Sue)'라고 불리는 한국인 매니저가 있었는데, 처음부터 살갑게 반겨주지는 않았지만 같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면접부터 채용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할 수 있었는데, 처음 출근해서는 청소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커피의 ‘ㅋ’자도 모르는 초보였고, 메뉴도 알지 못해서 주문도 받지 못했다. 라떼와 카푸치노의 차이도 몰랐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매장의 직원들은 다들 친절했다. 잘 모르는 나였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차근차근 하나씩 알려주었다. COSTA는 브루노 코스타와 그 형제가 1982년 런던에 창립한 커피 전문점으로 처음엔 런던 중심가에서 가판으로 시작해 지금은 120여 개 나라에서 브랜드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대형 커피 전문점으로 성장했다. 정통 이탈리안 커피를 영국에 소개한 그들은, 특유의 노하우와 전문성을 바탕으로 영국 내 2위의 커피전문점으로 성장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이다. 지금은 코카콜라 그룹에서 기업을 인수하여 운영 중이라고 한다. 덕분에 나는 커피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전문 기관에서 배우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개인 커피숍에 비하면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지금 커피 브랜드의 컨설턴트를 하고 있으니 정말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코스타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스티밍(Steaming)이었다. 우유를 데우면서 거품을 만드는 과정인데,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라떼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카푸치노를 만들 것인지에 따라 스티밍의 방법이 달라지는데, 라떼는 1cm의 거품을 먼저 만들고 난 후 우유를 데워주어 거품이 많지 않게 유지해야 했고, 카푸치노는 우유와 거품의 비율이 1:1이 될 정도로 거품을 많이 만들어 풍부한 거품으로 커피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거품은 최대한 큰 방울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거품을 벨베티(Velvety)하다고 표현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유를 다루는 것이 아주 재미있었다. 영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커피의 80% 이상이 라떼 혹은 카푸치노일 정도로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즐겨 마신다. 한국인들의 80%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에 비하면 신기할 수준이다. 게다가 그중 50%는 카푸치노를 마시기 때문에 스티밍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스티밍 하나만 잘해도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처음에는 형편없는 커피를 만들어 구박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나 곧 적응한 나는 일하는 동안 많은 개인 단골을 만들었다. 나를 지목해서 자신의 커피를 만들어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나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You make the best coffee in the world(당신이 만든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습니다.)'라고 칭찬해준 아주머니도 있었다.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은 나를 알아주는 고객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행복해진다.     

일을 시작한 것이 5월경이었고 Pre-sessional의 시작은 7월이었기 때문에 3개월이라는 시간을 바리스타에만 집중하며 보냈다. 커피 왕초보였던 내가 약 3개월 동안 커피숍에서 근무하면서 커피의 종류부터 커피의 추출 원리까지 대략적이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쌓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커피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안 커피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에스프레소로 대표되는 이탈리안 커피로 라떼,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등 많은 종류의 커피들이 파생되었다는 점은 매우 인상 깊었다. 이탈리아는 커피의 생산지도, 기원도 아닌 유럽의 작은 나라일 뿐이지만, 이런 작은 나라의 음식을 전 세계인이 따라 하게 되는 것은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자 본사에서 운영하는 바리스타 학습 과정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바리스타 마에스트로라 불리던 과정이었는데, COSTA에서 제공하는 레시피대로 얼마나 정확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얼마나 전문성 있게 커피를 만드는지를 심사하는 과정이었다. 열심히 연습한 덕분에 전체 과정에서 카푸치노 부문 2위에 올랐다. 스티밍 하나는 인정받은 셈이다.     

런던에서 가장 날이 좋다는 3개월을 커피와 함께 보냈다. 영국의 여름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습하지 않은 날씨 덕분에 야외 활동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다. 실내에서 일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한낮의 여유를 즐기며 여름을 준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더구나 영국의 커피숍은 대부분 오후 7시에서 8시 사이에 영업을 마치기 때문에 아직도 밝은 여름 저녁을 즐기기엔 한참이나 여유가 있었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문화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저녁 7시~8시만 되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한국이라면 그 비싼 월세를 내고 왜 그렇게 짧게만 영업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영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주 오래전 근로자들이 기계처럼 대접받을 때인 산업화 초기, 심각한 노동 착취로 인해 인간 존엄성을 위협받은 영국은 점차 산업화가 정착되어 감에 따라 일과 생활의 밸런스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아무리 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업무 시간 외에는 방해받지 못하도록 규정했고, 내가 가족과의 시간이 방해받지 않으려면 타인의 개인 시간 또한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른 산업화 덕에 형성된 근로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펍이나 레스토랑 등 몇몇 업종을 제외한 대부분 상점의 폐점 시간은 회사원들이 모두 퇴근한 8시경이다. 지역마다, 상권마다 편차가 있지만, 보통 동네는 신기하게도 8시만 되면 거리가 이상하리만치 한산해진다. 사람들은 둘 중 하나, 집 혹은 펍에서 자신과 가족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주 20시간을 바리스타로 근무하고 그 외의 시간은 오롯이 자유시간이었다. 수영장 정기권을 끊어 운동도 하고 친구들과 모여 맥주도 마셨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집 계약이 끝나 이사를 해야 했다. 다행히 인근에 Flat(한국의 아파트와 유사하다)을 얻어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아도 됐다. 학기가 시작되면 엄청나게 바빠질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주어진 여유를 있는 그대로 즐겼다. 예전 집에서 방을 쉐어하며 알게 된 민종씨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와 그의 동생은 한국에서 힙합 음악을 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영국에서 유학 중에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다. 평소에 내가 노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민종씨가 공연에 객원 맴버로 참여할 것을 권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민종씨 동생의 도움을 받아 노래에 스스로 가사를 붙이고 그들이 작업한 랩에 보컬을 맡았다. 항상 공연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상당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무대에 올라 첫 음을 한 옥타브 높게 잡아버리는 실수를 하긴 했지만, 내가 가사를 붙인 노래를 많은 사람 앞에서 불러보는 것이 가슴 뛰고 즐거웠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나는 본격적으로 학기를 준비해야만 했다. 사실 여느 대학생이라면 한창 여행을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여전히 여유로운 방학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나는 Pre-sessional 코스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Conditional Offer(조건부 입학)로 입학이 허락된 나는 4주간의 Pre-sessional 코스를 미리 들어놓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퀸메리대학은 런던 동쪽 2존에 Mile End라는 곳에 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남서쪽 4존이었기 때문에 런던 중심을 지나쳐 가야 했다. 처음 학교를 다녀온 후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일하고 있던 커피숍을 그만두는 것이 아쉬웠다. Pre-sessional에는 4주간 주 5일을 학교에 가야 했지만, 대학원은 수업 일정이 어떻게 편성될지 몰랐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등교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구태여 비싼 돈을 내고 학교 근처에 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일단 Pre-sessional 기간은 비싸더라도 1존을 포함한 monthly 교통카드를 구매해서 정석대로 다녀 보고, 본 과정이 시작되면 수업 일정에 따라서 비용을 조금 절약해보기로 했다.     

드디어 Pre-sessional코스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았지만,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아침 9시까지 학교에 가서 과정에 대한 안내를 받아야 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이른 아침 등교가 나름 상쾌하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런던은 출근 시간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매우 번잡스러울 수도 있으련만, 러쉬 타임이라 할지라도 기차건 지하철이건 사람들이 서로 밀거나 당기지 않는다. 기차나 지하철에 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타겠지만 만원이 될 경우에는 스스로 포기하고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그만큼 여유 있게 집을 나서기도 하고, 교통상황 때문에 지각하게 되더라도 본인의 업무에 영향을 주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용서가 되는 문화 덕분인 듯했다. 출근 시간이면 어떻게든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밀고 당기며 끼어 타는 한국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런 영국인들 사이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학교를 향하는 내 모습이 흐뭇해 절로 웃음이 났다.     

일찍 출발했음에도 먼 거리 탓에 9시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서둘러 리셉션으로 달려가 학기 시작에 대한 안내를 받고 교실을 찾았는데, 넓은 학교에 여러 개의 건물로 어디가 어디인지 알기 힘들었던 나는 수업이 진행되는 건물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맬 수밖에 없었고, 조금 늦게 수업에 참석했다. 교실로 들어서자 이미 열댓 명의 학생들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 절반 이상은 동양인이었고, 한국인도 더러 섞여 있는 듯했다. 내 차례가 돌아와 가볍게 소개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서너 명의 중국인, 서너 명의 한국인 그리고 나머지 러시아, 폴란드, 남아공, 대만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학원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수업은 어학원과 비슷하게 진행되었지만 다들 영어에 익숙하다는 전제 덕분인지 읽기와 쓰기의 비중이 컸다. 더구나 퀸메리가 의과대학과 법학이 유명한 학교여서 Pre-sessional코스에도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많았다. 법학의 IELTS 기준은 7.5점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 법학 전공자들의 영어성적은 기본적으로 7.0 이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학부를 지원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본국에서 신청한 유학 프로그램으로 영국에 처음 온 터라 대부분 Speaking 실력이 좋지 못했다. 지원한 전공이나 과정에 따라 영어실력이 상이하긴 했지만, 학기 중 겪게 될 읽기와 쓰기를 연습하는 것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읽기와 쓰기에서 차이가 나면 안 될 일이긴 하다.     

첫날 자기소개를 마치자 반에 나를 포함해 세 명의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은 기계과 전공의 학부생이었고, 또 한 명은 병훈이형이었다. 병훈이형은 한국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퀸메리의 법학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다소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똘똘이 스머프를 연상케 하는 병훈이형은 대학원 생활 내내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든든한 지원자로 나를 보살펴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병훈이형을 만나 식사도 같이하고 때로는 잠도 같이 잤다. 기숙사를 이용하던 병훈이형은 시험 기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방바닥을 내어줄 정도로 정이 많았다. 그런 날이면 둘은 런던 생활에 대한, 혹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밤이 새는 줄을 몰랐다. 덕분에 정작 시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병훈이형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친해진 사람들은 중국인인 옐린과 츄, 그리고 대만에서 온 메튜였다. 다들 영국에 처음 왔거나 혹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영국이라는 나라가 마냥 신기한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런던 소개를 자처하며 그들의 호감을 얻었다. 학교 수업이 마친 후면 버스를 타고 런던 시내로 나가 런던 구경을 시켜주었다. 그들 역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저녁 같은 날에는 그들 중 한 명의 기숙사 부엌(대부분의 기숙사는 별도의 방이 주어지고 부엌은 셰어 한다.)에서 포틀럭 파티(각자의 음식을 준비해 와 함께 즐기는 파티)를 하곤 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던가? 런던에서 파티를 빼면 서운하다.  

Pre-sessional과정은 생각보다 상당히 타이트하게 진행됐다. 주로 어학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읽어야 할 것들이 계속 주어졌고, 읽은 것들을 바탕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수업의 한 예를 들어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censorship(검열)을 주제로 한 다양한 기사와 에세이를 읽어오라 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군부 독재로 인한 검열이 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세계 각국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검열 제도가 공공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언론 통제와 그 영향에 대한 다양한 글을 읽어야 했다. 그 분량이 상당해서 거의 책 한 권의 수준에 육박했고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자료에는 censorship(검열)에 대한 다양한 케이스가 실려있는데, 이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개인적 견해와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다음날의 토론 과제였다. 어떻게 보면 censorship에 대한 평소 개인적 견해를 이야기하면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제시해준 케이스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구체적 사건에 대한 선생님과 상대 학생들의 주장에 반론할 수가 없고, 이는 내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로 읽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국 수업 시간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때론 선생님이 각자가 취해야 할 입장을 정해주신다. 선생님은 나를 포함해 두어 명의 학생들에게 '너희는 censorship이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해.'라고 하였고 나는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요인을 찾아야 했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내용들 속에서 그 반박 논리를 만들어내고 긍정적인 케이스들을 앞세워서 censorship의 정당성을 옹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수업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단지 어학 실력을 증진시키는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실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먼저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했다. 사실 검열이라는 것 자체는 어느 누가 보아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행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논하는 것은 도덕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측면에서, 혹은 알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에서 모두가 검열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검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찾아내야 한다. 내가 펼쳤던 논리는 아주 단순했다. 어린아이에게 성(性)에 대해 검열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정부의 입장에서 아직 미성숙한 대중에게 모든 것을 판단하도록 맡긴다면 정치와 정책 결정에 관여된 다양한 사실들을 고려하지 못한 대중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를 펴기 위해 주어진 자료 외에 더 많은 자료를 읽어야 했지만, 덕분에 토론은 아주 치열했다.      

이러한 토론 수업으로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바로 자신감이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그들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이다. 영어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도구였지만 그것은 단어 그대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영어를 학문으로 생각한다. 물론 영문과를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영어는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컴퓨터 활용능력이나 프레젠테이션 능력, 혹은 운전면허증처럼 말이다. 그동안 영어를 공부하면서 나에게 짐과도 같았던 시험 성적은 모두 쓸데없는 자격증과도 같았다. 독해 문제를 하나 더 풀고 듣기 문제를 하나 더 푸는 것보다는 영어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 영어 실력 그 자체를 증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영어를 사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진짜 실력이다. 차라리 영어는 어느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 되면 그 이상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본다. 운전면허시험 100점 맞는 것이 무엇에 쓰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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