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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19.

본 과정이 시작되고 과목별 첫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자신의 스타일과 주요한 평가 방법 등을 공유하며 각 수업의 목표와 앞으로 공부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옥스퍼드를 졸업한 여 교수님의 수업은 시작부터 대단했다. 말하는 것의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로 수업을 듣는 데 지장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교수님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후에 옥스퍼드 졸업생인 진명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영국에서도 Oxfordian(옥스퍼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적 수준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일반적 영어보다 고차원적인 단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덕분에 내 머리는 시작부터 풀가동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매번 단어의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몇 번 반복되는 단어는 즉석에서 전자사전을 통해 단어의 뜻을 확인해야 했다. 사실 여기서부터가 도전의 시작이었다.     

수업 내내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정치사상 강의를 하는 교수님들의 수준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단어나 내용에 대한 습득이 되어 있어야 했다. 교수님들은 각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수업 시간에 필요한 읽기 범위를 정해 주었는데, 그 중요도에 따라서 필수와 선택으로 나누어졌다. 어떤 교수님은 자신이 제안한 책의 내용을 읽지 않은 학생은 수업에 들어오지 말라고 처음부터 못 박아 이야기할 정도로 읽기는 수업의 필수 전제조건이었다. 문제는 교수님들이 제안한 읽어야 할 글들의 양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하루 평균 한 권 이상 분량의 에세이나 저널, 혹은 책을 읽어야 했는데, 필수자료만 읽는다고 하더라도 7~8시간은 읽어야 할 만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더구나 그러한 자료를 외국어로 대하는 나에게 시간은 1.5배, 아니 2배 이상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널이나 에세이의 경우는 그나마 읽을만한 내용이었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발행되는 책이니 그럴만했다. 하지만 전공 도서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혹시 정치학 교과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정치외교학도이니 당연히 경험이 있다. 교과서이기 때문인지, 번역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들의 취향 때문인지 책은 단순한 문장 구조나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한번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글들로 정치적 이념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두산백과)

언뜻 봐도 어렵다. 한 문장 안에 주어도 두 개 목적어도 두 개다. 이런 내용을 영어로 바꿔놓는다고 생각해보면 그 난이도는 더욱 심해진다. 영어는 문장 구조 자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Beginning in the 1970s and 1980s, its advocates supported extensive economic liberalization policies such as privatization, fiscal austerity, deregulation, free trade, and reductions in government spending in order to enhance the role of the private sector in the economy.'(Wikipedia)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단번에 알아보기 어렵다. 굳이 번역해보면 내용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지지자들은 경제에서 민간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민영화, 제정 긴축, 규제 완화, 자유무역, 정부지출의 감소와 같은 광범위한 경제 자율화 정책을 지지했다.'

정도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단어 자체도 매우 어려울뿐더러 문장 구조 또한 단순하게 연결된 것이 아니었기에 한 문장을 독해하는데도 몇 번을 다시 읽어야 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Pre-sessional 코스에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해준 교수님의 의도가 이해되는 듯했다. Full-time 학생이라면 하루 8시간 이상은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8시간으로 충분치 않았다.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우선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플랏 메이트(옆방 친구)를 찾아갔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중국 출신의 한국인(조선족)이었는데, 동네에서 농구를 하다 친해진 홍콩계 영국인 데렉의 여자친구였다. 이미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던 그녀는 나에게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물론 교과서처럼 당연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녀의 이야기 중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수업/에세이/논문 등 목적에 맞는 주제를 생각하고 읽어라.

방대한 양의 읽을거리를 모두 정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읽어야 할 내용 중에는 주제와 관련 없는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읽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수업이나 글쓰기에 필요한 주제를 먼저 생각하고 각 읽을거리의 목차나 서머리(요약본)를 통해 주제에 필요한 내용을 먼저 읽는 것이 방법이다.     

2. 밑줄을 긋거나 하이라이트를 쳐가며 읽어라.

많은 경우에 글을 읽다 보면 '중요한 내용이 앞에 있었구나' 하며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때때로 내가 읽었던 내용 중에 글쓰기나 논문에 인용할 내용을 찾아 책 전체를 헤매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밑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쳐 가며 읽으면 나중에 내용이 필요할 때 손쉽게 찾을 수 있다. 하이라이트 친 내용을 간단한 키워드로 노트에 정리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ㅇㅇㅇ책 28p. 신자유주의 반론" 이런 식으로 말이다. 후에 글쓰기를 위해 찾아야 하는 일이 분명히 발생할 테니 미리미리 찾아두는 습관을 갖자.     

3. 독해하지 말아라. 일단 읽어라.

아직 영어로 글을 읽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무의식 중에 첫 대면부터 독해부터 하려고 덤빈다. 첫 문장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피하도록 교육받아온 방식이다. 더구나 이제는 대학생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와야 한다. 영어 원서라 하더라도 우선은 쭉 읽어나가자. 한 손에는 형광펜을 들고서 말이다. 되는대로 해석하며 쭉 읽어 내려가다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라도 바로 다시 돌아와 독해하지는 말자. 체크만 해두었다가 어느 정도 내용 정리가 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 읽으면 된다. 때에 따라 정독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쭉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될 때까지 읽어라.     

4. 많이 읽어라.

읽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업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많은 양을 읽어야 하고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시간은 최소 1.5배 이상 증가한다. 이에 있어서 편법은 없다. 말 그대로 물리적 시간을 내서 많이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해, 결국 1.5배의 시간적 노력을 들이면 학기 전체를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수업은 물론, 에세이를 쓸 때도 논문을 쓸 때도 든든한 자료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 과목별로 교과서로 사용되는 책이 정해져 있으니 직접적 수업 범위 정도는 정독해 주면 된다. 이에 더해서 교수님이 제안해 주시는 참고 자료들도 거의 빠짐없이 읽기를 권한다. 수업 시간 언제 어느 자료를 이야기하기 시작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학원 수업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어왔다는 전제하에서 시작되니 반드시 시간을 할애해서 많이 읽기를 권한다. 모든 것은 다 당신을 위한 일이다.     

대학원을 미리 경험한 선배의 조언대로 시간을 내서 글을 읽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학기 시작과 동시에 하루 12시간씩 꼬박 책을 읽었다. 학교에 가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이 있었고, 등하교 시간을 고려하면 그 역시 12시간 이상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글을 읽을 틈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등하굣길 교통수단이 도서관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녹초가 되어 잠이 들기 바빴다. 수업이 없는 날은 전적으로 자료를 읽는 날이었다. 도서관에서 가져온 자료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온종일 읽었다. 아침 9시경에 일어나 저녁 9시경까지 쉬지 않고 말이다. 최대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식사하는 중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하루 12시간을 공부하다 보면 계속해서 집중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누가 시키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 집중이 되지 않을 때마다 스스로 다잡지 않으면 금세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일과를 쪼개서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각 자료의 중요도에 따라 시간을 쪼갰다. 자료의 난이도에 따라 읽기에 걸리는 시간이 천차만별이었지만, 사실 읽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분량만을 기준으로 시간을 나눌 수는 없었다. 필수읽기를 오전에 배치하고 참고자료는 뒤쪽에 배치했다. 대부분 참고자료는 에세이나 저널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가 수월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양을 정했고 진도가 느려져 시간이 오래 걸릴 경우엔 제목과 첫 줄만 스캔하고 넘겼다. 아무리 중요한 자료라 하더라도 그 자료 때문에 다른 읽을거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읽어야 할 분량 때문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지만 매시간 5분씩은 꼭 쉬어주었다. 쉬지 않고 2시간 이상을 읽을 때는 집중력이 흐려져 시간만 더 지연됐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50분 수업 후 10분 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 한 달은 정말 읽는 것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을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항상 남아있는 분량이 부담되어 마음은 늘 조급하기만 했다. 지금까지도 시력이 1.5인 나지만 이때는 침침해지는 눈 때문에 항상 피곤했다. 피로감을 달래기 위해 남들은 커피를 마셨지만, 나는 콜라부터 시작했다. 커피숍에 일하면서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나였기에 콜라만으로도 카페인 효과가 탁월했다. 아침에 일어나 콜라 한잔과 초콜릿 하나를 먹고 자리에 앉아 읽기를 시작하면 그런대로 서너 시간은 앉아있을 만했다. 최대한 시간을 쪼개야 했기 때문에 잠시 밥을 먹는 시간조차도 아까웠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그렇게 앉아서 12시간씩 책을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읽는 속도는 빨라졌다.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기보다 발췌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학술자료의 좋은 점은 앞쪽에 Summary(요약)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약 페이지만 읽어도 본문이 어떤 내용일지 대략 감이 왔다.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팁은, 요약 페이지에서 설명된 순서대로 본문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A-B-C-D인 요약본의 본문이 A-C-D-B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고로, 요약에서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았다면 본문에서도 그 페이지를 찾아내기가 수월했다. 찾아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내용 중 한두 구절에는 노란색 형광펜이 칠해지기 마련이었다.     

형광펜으로 표시가 된 부분에는 인덱스 포스트잇을 붙여 언제든 찾기 쉽게 만들었다. 나중에 에세이나 논문을 쓸 때 필요한 경우도 있었고, 수업 중에 필요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이라기보다는 유용한) 표현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했고, 덕분에 보관하는 자료의 양은 날마다 늘어갔다. 영국에서 표절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를 인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처럼 자료 정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교수님들은 수없이 표절(Plagiarism)에 대해 주의할 것을 강조했다. 논문이건 에세이건 공식적으로 제출하는 모든 자료에서 6개 이상의 단어 배열이 같을 경우 그 문장은 표절로 간주한다. 물론 동일한 6개의 단어 배열만을 찾는 것은 아니다. 전체 분량 중 20% 이상이 특정 자료를 그대로 인용할 경우에도 표절로 간주한다. 사실 작정하고 Cntrl+C(복사), Cntrl+V(붙여 넣기)를 하지 않는 이상 힘들 것 같아 보이지만 주요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출처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표절로 판정되면 자신이 취득한 학위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계에서 저자의 모든 학술자료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그 논문을 지도하고 도움을 준 모든 사람에게도 불명예로 기록되니 모두가 그토록 표절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강조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착실하게 찾은 자료를 논문에 인용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되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에서 리포트를 쓰듯이 시간에 쫓겨 알 수 없는 출처의 글을 마구잡이로 옮겨 적는 실수만 범하지 않는다면 표절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하던 한국에서의 대학 시절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다. 공부도 전략이기 때문에 어떤 과정을 어떤 목적으로 공부하느냐에 따라 그 전략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공부에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한 전략적 방법이나, 논문을 잘 쓰기 위한 전략적 글쓰기 방법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 노력이 필요하다. 스킬은 결국 스스로 몸에 익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몸에 익히기 위해서 수십 번, 수백 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반복해야 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방법을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그 스킬을 익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필요한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그 시간만큼 따로 떼어서 투자해야 한다. 결국 자신이 투자하는 만큼 스킬이 늘어나고 그 스킬로 목표를 이루게 된다. 공부도 일도 마찬가지이다.     

잠시 회사에서의 일을 이야기해보자. 회사에 들어와 처음 몇 년 동안 새내기로 있으면서, 나는 나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자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노력에 회의가 느껴졌다. 그런데 몇 년 후, 내가 후배를 받게 되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많은 후배 역시 하나 같이 새내기의 어수룩함을 보였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나도 그들도 회사생활이라는 스킬이 몸에 배지 않았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그게 곧 경력이 된다.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이나 회사생활의 스킬이 몸에 배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공부할 때와의 차이가 있다면, 회사에서는 강제로 8시간씩 시간을 투자하게 하지만, 공부할 때는 내가 스스로 시간을 정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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