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그저 고통으로 보는가?
인생은 고통의 연속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사실이 개탄스럽게 여겨질 수 있겠으나, 살아있는 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의 영역일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환경에 따라 혹은 외부 자극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예민성에 따라 고통의 정도는 상이하리라 예측된다. 그렇다면, 고통은 절대적으로 악의 축에 속하는가?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다고 피력하려 한다. 나아가 본 글에서는 고통 속에 존재하는 허여스름한 광채를 직시하는 법에 대해 제안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통을 마치 숙명이나 직분인듯 짊어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어떤 고통을 느끼는가? 이에 대해서는 분명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인지하고 있는 정보량의 차이를 넘어서,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근시안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매우 근시안적인 특성을 띈다. 고통이 자신과 근접할 때는 원근법인 양 매우 거대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법이고, 자신에게 괴리될 때는 그 고통의 정도나 고통이 유발하는 감정, 불편함 등에 대해 숙고는 고사하고 가늠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이 고통을 겪는 것을 목도했을 때 흔히 ‘공감한다’, ‘이해한다’라는 말을 뱉고는 한다. 그러나, 완전한 공감에 이르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해한다고 쉽사리 말하는 것은 결례를 범하는 행위일수도 있다. 직접 해당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완전한 공감에 이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술하였듯이 인간은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직시하는 지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고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함을 과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최근, 필자는 이전에 겪지 못했던 모종의 고통을 겪었다. 과거에는 해당 고통이 지닌 불편함에 대해 막연하고 피상적인 수준으로만 인지하고 있었으나, 직접 겪음으로써 완전한 이해와 공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고통이 지니고 있는 고요한 광채라고 생각한다. 타인과 동일한 고통을 겪음으로써 고통과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다. 이로써 타인의 수난에 대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온 공감을 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근시안적인 태도가 유발하는 무지함을 보완해주는 셈이다.
우리 세상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전혀 다른 개개인들이 결집되어 있는 복잡성을 띈 공동체이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고통은 ‘선’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타인이 겪는 고통을 '나도' 겪음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연민의 감정이 생기고, 분노와 이기심과 같은 감정들이 누그러질 수 있다. 즉, 고통은 타인에 대한 공감에 이를 수 있는 수단이자 공동체의 결합성이 강화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