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척추와 목뼈까지 총 7개 골절, 외상성 뇌출혈이 있었다. 그리고 어깨는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오죽했으면 갈비뼈에 금이 간 것과 찰과상, 두피가 찢어져 꿰맨 곳은 상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갈 것을 대비해 나는 빠르게 간병인을 알아보았다. 성별, 의식이 있는지, 거동이 가능한지에 따라 금액이 다른데 남편은 130kg의 몸무게에 거동 안됨이라 최고 금액에 추가 금액이 더 붙었다. 지불은 일주일 단위, 현금으로. 소개 업체 수수료까지 대충 계산하면 일주일에 100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라 고민하는 내게 시댁에선 당연히 간병인 둬야지 어린애 두고 어떻게 할 거냐고 종용했다.
당시 몇 년 동안 경제권은 남편에게 있었고 금전문제는 일체 일임했기 때문에 내가 따로 가지고 있던 비상금으론 생활비와 병원비, 간병인비를 전부 다 부담하기 힘들 것 같아 나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그전에 시댁에 먼저 얘기를 꺼냈다. 애아빠가 정신 들어서 수습할 수 있을 때까지만 도와주십사 하는 부탁에 시어머니는 화를 내시더니 내게 종이 몇 장을 집어던지셨다. 그건 남편이 냈어야 할 백 단위 금액의 미납, 연체 고지서였다. 사고당하며 핸드폰도 완전히 박살이 나서 쓸 수가 없는 상태. 금융거래를 해야 해서 어떻게든 해결을 하려고 당시 오가며 친하게 지내던 핸드폰 가게에 가보려고 한다니까 시댁 식구들은 일요일인데 열겠냐고 도움은커녕 여기다 얼른 연락이나 하라고 지인이라는 손해사정사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이 나이 먹고 엄마한테 남편 간병비랑 생활비 때문에 돈 해달라고 얘기해야 하는 등신 같은 내 처지 보다 남편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그 자리에서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명함 내려놓고 애 안고 나온 나는 결국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오열한 후에 핸드폰 가게에 갔으니 내 몰골에 사장님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잠든 애 안고서 누가 봐도 운 얼굴로 처참하게 박살난 핸드폰을 가지고 왔으니까. 남편이 사고를 크게 당했다고 핸드폰부터 복구해야 하는데 이거 새 핸드폰 사서 연락처 옮길 수 있겠냐고 또다시 울먹거리는 내게 사장님은 남편의 안부를 묻고, 매장에서 있던 핸드폰 하나를 그냥 내주셨다.
그렇게 유심을 옮긴 남편의 핸드폰을 가지고 돌아와서 받은 첫 전화는 물건 대금 지불 지연 전화였다. 죄송하지만 남편이 지금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있고 급한 일만 정리가 되면 빠르게 해결드리겠다고 하자 거래처 사장님은 도리어 괜찮다고 나중에 연락 주라며 전화를 급히 마무리했다.
그게 모두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엄마는 가타부타 더 묻지 않고 돈을 입금했고 나는 제일 먼저 어머니가 내게 내민 그 고지서부터 해결했다. 막상 그때는 그 문제에 대해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알아서 하고 있다고 전적으로 손을 놓고 있었던 내 탓인 거다. 하지만 나도 한낱 사람이라 서운한 마음은 들었다.
초반엔 뇌출혈 때문에 남편이 정신이 좀 오락가락해서 간병인을 뒀어도 매일 병원에 갔는데 오후에 돌아와 식사하셨냐고 묻자 애랑 같이 남은 밥 다 드셨다길래 내가 밥을 더 해야겠다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사코 내일 아침에 하게 밥을 하지 말라시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나보면 밥 먹고 다니냐 소리부터 하는데. 하는 설움이 몰려와 저는 아직 밥 안 먹었는데요? 하고 뾰족하게 대답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별 일이 아닌데 나는 조그만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점차 미움이 쌓였다.
어머니는 남편이 석 달 넘게 입원한 동안 병문안 한 번을 안 오셨다. 거기다 시누이는 내가 없을 때 남편에게 와서 몇 시간씩 내 흉을 보고 가기도 했다.
병원 면회 때문에 새벽에 나가며 애는 아직 자고 있고 좀 부탁드린다고 하는 말에도 대꾸 없이 티비만 보시는 어머니. 손에 힘없는데 하필 카디건 입혀 보내라고 꺼내놨다고 그거 단추 채우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대뜸 전화해서 소리 지르시길래 그것 때문에 조금 서운했다고 이야기하자 야! 울 엄마가 애 봐주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 하고 화를 내던 시누이.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지난 일 여 년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으시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아직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는 어린애까지 데리고서 모시고 다니며 쌓인 서운함도 내색 않고 있었는데 남편의 일까지 겹치니 나는 처음으로 그냥 다 놓아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랑 아이, 그리고 우리 가족한테 그렇게 잘하는데.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가족까지 사랑할 수 없다고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의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픈 사람한테 짐을 더 지우기 싫었다. 설움을 토로하는 내게 엄마는 아픈 애 더 속 시끄럽게 얘기하지 말고 나한테 얘기하고 풀고 그만 잊으라고 했다. 그 시기에 나는 문득문득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견딜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힘들고, 원망하고 탓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러고 있는 나 자신도 싫고, 그저 막막하고 불안함만 가득해서 무언가에라도 기대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남편 역시 내게 오해가 단단히 쌓여 있었고 3개월 후 퇴원하고 집에 있을 때 우린 처음으로 이혼 이야기까지 꺼내며 크게 싸웠다.
내가 그냥 묻어 두려고 했던 그것은 그냥 언제든 터질 폭탄이었던 거다. 어머니에게 냉랭한 내 태도를 문제 삼아 남편이 따지고 들었고 나는 처음으로 내 편이 아닌 남편에게 크게 실망해 그동안 내 속에 쌓아둔 독을 다 쏟아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걸 다 따지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 치졸하고 좀스러웠다. 하지만 옹졸하게 켜켜이 쌓아두었던 못된 마음을 그렇게 쏟아내고 나니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