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후회한다. 아이 앞에서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남편의 사고가 확인된 순간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이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오열했다. 사실 그땐 애고 뭐고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놀라서 내 다리를 붙들고 매달려 울던 조그만 아이의 눈물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아픈지 나는 정말 두고두고 후회한다.
남편의 사고 이후로 아이가 잠을 자다가 악을 쓰면서 깨는 일이 1년 정도 벌어졌기 때문이다.
예민한 기질을 가진 아이라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런 일까지 벌어져서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 포함 원장 선생님까지 아이에게 참 힘을 많이 써주셨다.
1년을 낮잠시간에 우리 아이만 따로 안정된 공간을 만들어서 선생님이 옆에서 데리고 보셨다고.
그 당시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급히 병원에 가느라 동생에게 아이를 떠넘기듯 안겨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아주 어릴 때 기억이니 나는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엄마. 나는 그때 엄마가 나를 버리고 가는 줄 알았어. 라고 해서 몇 년이 훌쩍 지나서 아이는 나를 울게 했다.
그리고 또 아직까지 엄마랑 내가 기억하는 일인데.
외상센터 중환자실은 면회시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친정에서 왔다 갔다 할 때다. 잠깐 집에 들렀다가 다음 면회 맞춰서 가려니까 아이가 방에서 안 나와서 엄마 아빠 보러 갈게 하이야. 하니까 방에서 목소리만 응! 엄마 잘 가! 하길래 나도 애를 보면 눈물이 나니까 그냥 밝게 응 엄마 갈게! 하고 나갔다. 그러고 출발해서 가는데 엄마가 울먹이면서 전화를 하신 거다. 애가 하도 안 나와서 뭐하나 하고 가봤더니 혼자 울고 있다고. 그 말에 눈물이 터져서 급하게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울었다.
4살. 36개월 생일 갓 앞두고 일어난 아빠의 사고로 슬픈 생일을 보내고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할머니에게 이제 그럼 할머니가 내 엄마냐고 묻던 아이.
그 아이는 불쑥 자라 올해 취학아동이 됐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겐 꽃샘추위가 기승인 봄과 다름없던 그 매서운 봄이 지나 나는 5년의 경력단절을 뒤로하고 취업한다. 취업과 더불어 24/7의 독박 육아 모두 졸업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남편은 재활을 하며 육아 대디의 삶을 1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