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로 살아온 지 수 십 년이건만 가톨릭 성지를 방문해 본 것은 손꼽기도 부끄러울 만큼 몇 차례 되질 않는다. 그것도 성지라 하여 개인적으로 일부러 찾은 것도 아니고 어쩌다 단체에 끼어 가 본 몇 군데가 전부다.
이번 여행만 해도 그렇다. 성지를 방문해 보자고 계획했던 여행도 아니었고 목적지 중간 경유지 가까이에 마침 성지가 있었기에 들러보자 했던 것뿐이었다.
충청도 당진 일대. 그 고장엔 유난히 성지가 많았다. 신리, 솔뫼, 원머리 성지 외에도 합덕, 공세리 등 유서 깊은 성당도 많았다. 아마도 지리적 여건으로 천주교를 일찍이 받아들였고 그만큼 신심이 깊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우리가 들렀던 곳은 신리와 솔뫼 성지였다. 신리성지를 먼저 방문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탁 트인 넓디넓은 잔디밭에 듬성듬성 서 있는 건물들과 조형물들이 노란 겨울 잔디 색깔과 멋진 조화를 이루어 자칫 쓸쓸해 보일 수도 있는 풍경을 운치 있고 고즈넉하게 연출해 주고 있었다.
김대건신부님의 생가가 있기도 한, 중후한 돌들로 꾸며져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솔뫼성지를 먼저 방문했더라면 신리가 자칫 황량해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잠시 해봤다.
신리성지는 다른 성당들과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무들이 거의 심어져 있지 않은 넓은 잔디밭이 그랬고 그 잔디밭과 어울리는 낮은 성당 건물이 그랬다. 그리고 뭣보다 특이한 외관의 미술관 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참으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그 순교미술관 건물은 얼핏 보기엔 마치 버려진 중세 유럽의 성곽 일부 같은 독특한 외양을 가졌지만 그 지하엔 엄청난 크기,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는 거대한 순교화 18점이 전시된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작품들은 유능한 화가의 손길을 거쳐 순교의 과정과 순간들을 여지없이 되살려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신앙과 종교를 위해 명예와 재산과 가족과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새삼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밀려왔고 동시에 내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는 숙연한 시간이었다.
탑 꼭대기엔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이 열려 있었다. 사방으로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토록 풍요로운 땅에서 일어 난 피의 박해와 탄압 그리고 순교...
그 모든 걸 지켜본 하늘은 야속할 정도로 푸르기만 했다.
김대건신부와 함께 몰래 입국한 프랑스 신부인 다블뤼주교는 병인박해로 순교하기까지 21년간 이 고장에 숨어 지내며 최초의 한글 교리서와 순교자들의 역사 그 밖의 수많은 책을 저술하고 성경을 번역했다고 한다.
배로 깊숙이 내륙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 지역 특성상 천주교 전파와 신부님들의 유입이 가능했으며 그 결과 조선 최대의 교우촌이 이 일대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박해와 탄압도 심했고 그 피 흘린 땅 군데군데 성지가 세워진 모양이다.
그런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발전한 기적이 이루어졌지 싶다.
너무나 아름답고 운치 있는 신리성지.
아름다운 만큼 가슴 아픈 신리성지.
발걸음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 오고 싶어지는 신리성지.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장소는 단연 신리성지였다.
멋지고도 슬픈 그곳에 내 마음을 두고 온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