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를 수확했다.
귀촌이랍시고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산 지 어언 7년. 비록 앞마당 텃밭이긴 해도 해마다 이것저것 작물을 심어 먹었으면 이제 제법 일머리가 트이고 요령이 좀 생길 만도 하건만 여전히 서툴고 생소하고 도무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느낌이다.
옥수수만 해도 그렇다. 이 강원도 산골짝 곳곳에 옥수수밭이라 우리도 첫해부터 야심차게 옥수수 50 포기를 심었었다. 나는, 옥수수가 그렇게 우람하고 키가 크니 한 포기에 여러 개가 주렁주렁 풍성하게 달릴 줄 알았다. 고추나 토마토처럼.
남편이, 옥수수는 한 대에 딱 한 개만 열려. 두 개가 열리면 한 개는 따버려야 해. 그래야 남은 한 개가 튼실하게 여물어. 했을 때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위풍당당한 자태에 겨우 한 개 달랑 열린다고? 설마. 옥수수가 그렇게 가성비 형편없는 작물일 리가 없어.
그러나 정말 자랄수록 달랑 한 개의 열매만 품는 바람에 옥수수에 대한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록 50개 밖에 안 되는 옥수수지만 첨으로 내가 심은 옥수수를 딸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오늘 딸까. 내일 딸까?
마침내 수확하기로 한 아침에 마당으로 나가서 마주 한 풍경은.... 한마디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옥수숫대는 모조리 꺾여 쓰러져 있었고 무성했던 잎들은 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수염이 진갈색으로 변해 딸 시기를 알려주던 옥수수 열매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밤새 멧돼지가 다녀 간 것이었다. 어쩜 우리 마음과 멧돼지의 마음이 일치한 것일까. 우리가 따야겠다 생각한 시기와 멧돼지가 따먹기 알맞다 싶은 시기가 이토록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다니.
하루만 먼저 수확했으면... 발을 동동 굴려봤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고 어쩌다 실수로 한 통 정도 흘리고 가지 않았을까 샅샅이 뒤져봐도 단 한 개의 옥수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론 아예 옥수수 따윈 심지 않는다 선언을 하고 해마다 이맘 때면 몇 접씩 옥수수를 사서 멀리 사는 지인들에게 골고루 부쳐주곤 했다. 물론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가 농사지은 것이라 생각하지 멧돼지에게 빼앗기기 싫어 농사를 포기하고 사서 보내 주는 줄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랬던 우리가 올해 다시 옥수수 농사에 도전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이 인근에 대규모의 멧돼지 소탕 작업도 펼쳐졌고 집집마다 개들도 키우고... 그래서인지 근래 통 멧돼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가뭄이 심했고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심은지라 거의 돌아보지 못했음에도 옥수수는 무럭무럭 자랐다. 왜 척박하고 비탈진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옥수수를 심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옥수수는 익어갔고 드디어 오늘 아침 수확하기로 작정을 했다.
해가 뜨기 전 뿌연 안개를 헤치고 옥수수밭으로 내려갔다. 나무처럼 키가 큰 옥수수들은 변함없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행히 몇 해 전의 처참한 악몽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일단 옥수수를 뚝뚝 부러트려 던져놓고 한꺼번에 주워서 포대에 담고...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옥수수 수확은 꽤나 재미가 있었다.
높이가 있다 보니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어 힘이 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수확한 옥수수는 150통 정도가 될 것 같았다. 누구에게 보내 줄까. 보내주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즐비하게 스쳐갔다. 에구, 올해도 옥수수를 또 한두 접 사야겠군.
이렇게 멧돼지에게 도둑맞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많이 심어도 되겠구먼.
작년에도 심고 싶었지만 물을 많이 줘야 하고 손이 많이 간다 해서 지레 포기를 했었더니 이렇게 심기만 하고 방치해도 가물어도 폭염이 계속되어도 묵묵히 잘 자라고 잘 열매 맺는 게 옥수수란 걸 이제야 알았으니 내년엔 아주 모종을 잔뜩 사서 심어야지. 그래서 진짜 우리가 농사지은 옥수수라고 큰소리 땅땅 치며 보내줘야지.
그래도 여전히 옥수수에 대해서는 유감이 많다. 그 훤칠하고 늠름한 자태에 한 열 개라도 아니, 다섯 개라도 열리면 얼마나 좋으냐. 그럼 수확의 기쁨이 5배가 될 텐데.
물이 부족해선가 비료를 안 줘서인가. 옥수수는 모두가 작고 볼품이 없다. 그래도 해발 700미터에서 자란 진짜 무공해 옥수수여서인지 맛은 기가 막히다. 야들야들 씹히는 식감이 일품인 나의 첫 옥수수.
내 옥수수 농사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