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단 말의 효과

by 세실

피를 좀 모자라게 뽑아서요...

거기까지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아~ 낮게 비명을 지르며 다시 뽑으러 오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 네, 다시 오셔야 해요.


그런 전화를 병원으로부터 받은 건 지난 목요일이었다. 내일 아침 공복인 상태로 오라고 했지만 다음 날인 금요일은 남편의 일정 때문에 못 갔고 토, 일은 휴원이었고 월요일 역시 남편이 바빠서 못 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화요일 아침 공복인,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상태로 병원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자고 일어나면 다섯 손가락 중 3개가 펴지질 않았다. 집게, 중지, 약지. 그중 중지가 젤 심했다. 억지로 힘을 주면 뚜둑하며 펴지는데 꽤 아팠다.

방아쇠 수지 증후군. 그게 재발한 건가.

15년 전, 중국에 살 때 느닷없이 엄지가 잘 펴지지가 않아 찾아 간 병원에서 내린 병명이었다.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하고 감쪽같이 나았다가 10개월 후 재발했다. 다시 찾아 간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유했다.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면서.

중국에서 수술이라니. 아무리 간단하다 해도 결코 중국에서 수술 같은 건 하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샅샅이 검색했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으면 회복한다는 문구를 기어이 찾아냈다. 그때부터 엄지를 꽁꽁 싸매서 전혀 굽혀지지 않게 해놓고 2~3달을 지냈나 보다.

그렇게 자가치료로 회복이 된 후 15년 동안 아무 탈이 없더니 결국 재발했나 싶어 우울했다. 증상이 아주 흡사하니까.


손가락을 살펴본 의사는, 방아쇠 증후군은 아닙니다. 그건 손가락 한 개에만 발생하지 이렇게 단체로 아프진 않아요. 혹시 류마티스일지 모르니 피검사 한번 해 봅시다. 그렇게 피를 뽑아 놓고 약을 일주일 치 처방을 받아 온 터였다.


슬며시 부아가 났다. 남편이 운전해 주지 않으면 이 산골짜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허구한 날 피 뽑는 게 일인데도 불구하고 모자라게 뽑은 그 간호사에 대해서도.


병원에 들어서자 아침 9시도 안 된 시간인데 대합실에 환자들이 빼곡했다. 카운터엔 오늘 예약 만료 되었다는 팻말이 내걸려 있다. 시골 마을에서 그나마 믿을만하다 알려진 병원다운 풍경이었다.

바로 카운터로 가서 피 모자라게 뽑은 사람이라 말하자 모든 순서 무시하고 바로 처치실로 불러들였다.

간호사에게 한 마디 했다.

날마다 뽑을 텐데 왜 적게 뽑아 가지고... 교통이 불편해서 나오기가 쉽지 않거든요.

죄송해요.

더 이상의 변명은 없었다.

죄송하단 말. 그 한 마디가 뭔지 속 상했던 마음도, 산에서 내려와야 했던 번거로움도, 바늘이 혈관을 찌르는 아픔도 스르르 사라지고 감수가 되었다.

사과라는 게 이런 것인가. 가끔 논쟁이 발생했을 때,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를 바랄 뿐이었다. 혹은, 이런 상황인데도 사과 한 마디 없었다.라는 등 사과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걸 심심찮게 보게 된다.

미안한 상황에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 한 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죄송하단 그 간단한 한마디에 이리 마음이 다 풀어지는 것을.


그나저나 부디 류머티즘 만은 아니기를, 그저 퇴행성관절염이기를 비는 마음이다. 그것도 아니고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아침저녁 먹으라고 처방 받은 약은 왜 아무런 효험이 없는 걸까.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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