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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 미정 Mar 16. 2024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법

어떻게 하면 성공이라는 길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난 사람들과 인맥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더 뽐낼 수 있을까.

지금으로는 부족해 더 열심히 해야 해. 더 부지런해져야 해

잠을 줄이고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해.

저기 다른 사람들을 봐 저 정도는 돼야지 번아웃이 오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나를 몰아붙이며 살았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 지위를 갖고 싶어 욕심을 부렸다.

사람들이 욕심을 좀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욕심 좀 내면서 살면 안 되는 거냐고

이게 뭐 그렇게 욕심인 거냐고, 나에게 욕심 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알기 딱 한 달 전

이사로 남편과 몇 날 며칠을 싸웠다. 삶이 지긋지긋하다며 더 넓은 집에서 살자고 했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이곳에서 나가자고 했다.

늘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신랑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신랑의 태도에 더 독기가 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사람은 오늘 죽는 거 모르고 내일 어떻게 살지 생각한다는데 그 말이 딱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의 욕심이 부질없다고 느껴진다. 성공이 뭐고 큰집에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아프면, 내가 죽으면 다 부질없는 건데 말이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 이제야 절절하게 이해된다.


아직도 말하지 못한 지인들과 친구들이 있다.

2월 말 대학원 모임에서 여행을 가자고 하는 연락이 왔다. (나는 그 모임에 총무를 맡고 있다.)

여행이고 뭐고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하기 싫어도 눈치껏 열심히 장소 찾아보고 의견을 물어보고 취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제일 눈치 봐야 할 것은  나의 건강이었다.

"제가 작년 말에 유방암 진단을 받아서 수술을 앞두고 있어요. 이번 모임은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신경 써주세요."라고 남겼다.

교수님과 원우분들이 어쩌다 그렇게 됐냐며 힘내라고 응원을 문자를 남겨주셨다.

그중 교수님 한분이  다른 병원 가서 다시 검사받아보라는 내용으로 개인적으로 연락 주셨다.

000는 안된다고 빅 5 병원을 가봐야 한다고 했다. 쉬운 수술이 아니라면서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말을 덧 붙였다.

"우리  000 교수님도 머리가 아파서 000에서 머리 열고 수술했는데 결국 원인을 못 찾았잖아요.

서울아산 병원 가서 치료하고 다 나았잖아요.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래요. 빅 5 병원에 가서 꼭 다시 검사받아요." 하셨다. 그러면서 서울아산병원 유튜브부터 많은 링크를 보내주셨다.

"아 ,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지만

나는 유튜브도, 링크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 교수님의 조언 때문에 골치가 아파져 왔다.


가끔 연락하는 친구에게 별일 없냐는 연락이 왔다.

숨기지 않고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어느 병원에서 치료하기로 했냐고  하길래 000에서 한다고 했더니

그 친구 왜 한 군데서만 검사해 보고 결정했냐면서 더 큰 병원 가서 검사 한번 더 받아보라고 했다.  

유방암으로 유명한 서울아산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친구의 신랑도 2년 전쯤 갑상선수술을 받았는데 아산병원에서 받았다고 했다.

수술을 마치고 요양병원에서 2주 있다 나왔다면서 퇴원하고 집으로 가지 말고 요양병원 알아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형님도 전화해서 수원에서 서울 가깝지 않냐면서

왜 서울에서 수술 안 하냐면서 걱정하셨다. 청주에 있는 본인 친구들도 다 서울 가서 수술한다며

내 결정이 이해 안 간다는 말투였다.


성형의 고민이 끝나니 병원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온 신랑에게 고민을 말한다.

"오빠, 사람들이 나보고 다 바보래."

"왜?"

"000에서 수술한다고. 왜 더 알아보지 않냐고."

"000도  큰 병원인데."

"교수가  이렇게 많이 보내더라. 서울 아산병원 가면 전체를 절재 안 할 수도 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는 듣지도 마. 네 가슴 초음파 사진을 안 봐서 그래

뿌옇게 넓게 퍼져있잖아. 여기 의사들은 바보야? 다른 병원 의사도 전체 절제 해야 한다고 했잖아.

흔들리지 말고 믿자. 믿어보자."

맞다. 신랑 말처럼 초음파에서 내 가슴 안에 암덩이는 뿌옇게 넓게 있었다.

"나 퇴원하고 요양병원 들어갈 거야."

"요양병원까지 갈 정도 아니라고 의사가 그랬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요양병원으로 들어간데,

 왜 오빠 돈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리고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저번에 수술 끝내고 4월부터 다시 일해서 연봉 몇천 벌어오라고 했잖아.

내가 참 기가 막혀서, 내가 이 집에 소야? 어떻게 나한테 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내가 왜 병에 걸렸는데 쉬지도 않고 일하니깐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오빠까지 나를 돈으로 아는 거야?"

"누가 그렇데. 4월 정도 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 아니야.

왜 사람말을 꼬아서 듣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래, 요양병원가. 들어가서 나오고 싶을 때 나와."


내가 가장 의지하는 신랑에게

요양병원 이야기 했을 때 "그럼 가야지. 가서 몸 더 챙겨야지." 이런 말이 듣고 싶었는데  

의사도 갈 필요 없다며 라는 말을 들먹이며 요양병원까지는 오버라는 그의 말투에 기 막혔다.


여러 사람의 조언이라는 이야기에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했는데

싸움의 불이 붙어버렸다.

감정이 상해버리니 저번엔 웃으며 했던 (다시 일 시작하라는 이야기가)

어떻게 나한테 일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도 감내야 하고 수술 후의 고통도 오롯이 나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에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구나 라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픈 나만 가엾다.

수술 후 요양병원까지 고려해야 내 처지가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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