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와 자본주의, 길상사에 대한 생각
길상사는 과거 대한민국을 흔들던 권력가들이 놀던 '대원각'이란 요정이었습니다. '대원각'의 소유주는 김영한으로 16살 때 궁중 아악과 가무를 배우며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진향은 1950년대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운영하여 대원각을 만들었습니다. 군사 정권 때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 중 하나였습니다. 대원각은 건물 40여 채와 토지면적 7,000평으로 규모입니다. 보수적으로 평당 5,000만원만 잡아도 3,500억원 수준입니다.
진향은 1980년대 중반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대원각 시주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하려고 하였으나 법정 스님은 “모든 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10년 가까이 거절했습니다.
1995년 법정 스님은 결국 시주를 받아들였습니다. 김영한은 수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염주와 맞바꾸었습니다. 김영한 여사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수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수천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며 한 치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고 부처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길상화란 이름은 ‘불길한 것을 파괴하고 길상한 것을 성취한 꽃’이란 의미입니다. 대원각에서 길상사로 변신한 것을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욕망을 의미했던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깨달음의 공간, 길상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깊은 감동을 느낀 부분은 법정 스님의 창건 법문이었습니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
법정 스님은 길상사가 호사스러운 절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서울 최고의 입지에 있지만 가난한 절이 되길 원했습니다. 풍요를 경계하였으며 가난이 올바른 정신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은 쉽지만 가난을 스승 삼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어떻게 가난을 스승 삼아 올바른 정신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줬습니다.
길상사에 위치해 있는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유골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원했던 것처럼 진영각은 호사스럽지 않고 가난한 절로 보입니다.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셨기에 유품이 많이 없습니다. 법정 스님이 아닌 보통 사람이 이런 것을 유품으로 남겼다면 왜 이런 것을 남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법정 스님의 유품 중 아래 사진에 나와 있는 낡은 세숫대야와 면도칼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무소유, 법정 스님
2023년 4월 제가 방문했던 길상사는 평화로웠고 아름다웠지만, 법정 스님이 원했던 것처럼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으로는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학기당 20만 원을 받고 진행하는 불교대학과 판매시설은 법정 스님이 바랬던 길상사가 아니라는 확신을 했습니다. 불교대학은 법정 스님의 영향력이 없었던 2010년에 개원하였습니다.
2007년 법정 스님은 폐암을 진단받았습니다. 법정 스님은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휴스턴 앤더슨병원 인근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전세 내 100일 동안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법정 스님은 2008년 3월 18일 길상사를 방문합니다. 당시 법정 스님은 덕조 등 세 상좌들과 함께 개축 중인 명상수련원을 둘러보며 “호화롭지 않고, 지나치지 않게 하라”고 누누이 당부했습니다.
2009년 2월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서 “10년 전 이 절을 만들 때 가난한 절을 내세웠으나 내가 이 자리에서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끝에 으레 불사를 내세워 돈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때마다 저는 몹시 곤혹스러웠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제발 더는 스님 팔아 장사 말라
법정 스님
또한, 법정 스님은 "길상사는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든,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무소유’의 사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깜’이 아닌데 단지 법정 스님의 문도라고 해서 길상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2010년 1월 법정 스님의 건강은 악화되어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합니다.
시주 길상화는 법정 스님을 믿고 몇천억의 대원각을 시주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사찰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았기에 10년 가까이 시주를 거절했습니다.
저는 책으로 '길상사'를 배웠습니다.
길상사는 제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사찰이었습니다. 2023년 4월 9일 길상화의 큰 뜻과 법정 스님이 만들어 낸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기대하며 부푼 마음을 갖고 길상사를 찾아갔습니다.
좋은 날씨에 사랑하는 가족과 길상사를 걷는 것은 더없이 행복했지만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다시 오고 싶지 않은지 생각해 봤습니다.
길상사는 길상화와 법정 스님이 원했던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는 가난한 절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일화를 보면 길상화의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법정 스님은 길상사를 '무소유'의 사찰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길상사를 자본주의로부터 지키지 못해 힘들어하셨을 법정 스님을 생각하니 슬프고 마음이 아려옵니다.
법정 스님을 생각하며 법정 스님이 남기신 글로 마무리해 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중)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버리고 떠나기' 중)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홀로 사는 즐거움' 중)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아름다운 마무리' 중)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아름다운 마무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