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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희 Oct 28. 2022

뿌리내리기

-시카고 이야기

환갑을 앞둔 남편이 갑자기 하던 일을 정리한 후 “일하는 기계처럼 사는데 지쳤어. 10년만 미국 가서 사람처럼 살아보자.”는 제안을 가장한 통보를 했다.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은퇴 후의 평범한 삶을 계획하고 있던 나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더구나 아들도 취업을 한 후 독립해서 나가서 이제 겨우 내 삶을 사나 싶은 때였고 넉넉하지는 않아도 두 사람의 노후는 걱정은 없을 정도인데 남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오십 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관계들과 해오던 일 다 버리고 난데없이 미국에 가서 살자는 남편에게 이 나이까지 함께 살았으니 차마 이혼하자는 소리는 못하고 ‘졸혼’이라는 말까지 내뱉으며 완강히 저항해 봤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배웅을 하는 친구들은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니고 은퇴할 나이에 전문직 비자로 직장까지 구한 상태에서 미국으로 가는 우리 부부를 부러워했지만 수도 없이 미국 출장을 오간 남편도, 여러 번 동행했던 나도 전혀 몰랐던 또 다른 모습의 미국 살이는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미국에서의 나는 민들레 씨앗 같았다. 바람에 날려 어느 집 앞마당에 앉으려 빙빙 돌면 또 다른 바람이 불어와서 휙 날려 다른 자리로 옮겨버리고 가서 또 비집고 앉아볼까 내려가는 사이 또 어디선가 돌풍이 불어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기분이었다.


제일 적응하기 힘든 것은 속도였다. 일상생활의 속도가 70년대, 8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았다. 한국에서 중년의 나이까지 살 다 온 우리에게는 미국 생활이 느리다 못해 답답하고 지루했다. 속도만 쫓다 지쳐서 미국행을 선택한 남편조차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가 알던 미국 맞아?”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세계 최고의 미국은 온데간데없고 미국의 온갖 단점들만 보이기 시작했다. 운전면허 따기, 관공서 이용하기, 은행 이용하기 등, 모든 곳이 너무나 느리고 알 수 없는 원칙들에 숨 막혔다. 우편으로 보내온 면허를 못 받았다는 이유로 폐기시켜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몇 초 안에 간단히 보낼 수 있는 자동이체도 절차와 방법이 복잡하고 수수료도 비쌌다. 관공서 방문에서는 전화 연결은 기본 30분은 들고 있어야 가능했고 공무원이 뻔히 놀고 있으면서 조금의 부족함만 있어도 도와주지 않고 휴가까지 내고 온 사람을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돌아가서 확인해보면 조금만 도와주면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전화 한 통이면 배달되지 않는 음식이 없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주문만 하면 새벽 문 앞에 신선한 식재료가 놓여 있는 편리한 삶을 살다 주말마다 장 보러 가는 게 큰 일과가 되어버린 것도 불편하고 힘들었다.


우리 부부가 미국 오자마자 COVD-19가 기승을 부렸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 뉴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냉동차에 시체를 쌓아놓은 뉴스를 보며 ‘세계 최강 미국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왜 이래? 이러다 늦은 나이에 미국 와서 객사하는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시카고 다운타운에서는 흑인들의 폭동과 방화사건까지 터져서 마치 전쟁 같았다. 또한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총기 사건 뉴스에 나는 미국 온 것을 후회하며 한국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었다. 밤중에도 한강변에서 치킨과 맥주를 먹을 수 있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한국은 얼마나 안전한가?


때로는 편리한 것조차 불편했다. 마트를 가면 비닐봉지를 돈을 주고 사서 써야 해서 하나의 봉투를 사서 물건들을 몽땅 담아오거나 가져간 장바구니를 이용하곤 했는데 열 개의 물건을 사면 거의 열 개의 봉투에 따로 담아 주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처음 살던 아파트는 쓰레기를 하나의 비닐봉지에 몽땅 넣어서 버리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병이면 병, 종이박스. 음식 쓰레기 등 분리수거가 생활화되어 있는 나에게 몽땅 섞어서 쓰레기 통에 버리는 일은 몸은 편해도 마음은 불편한 일이었다.

인터넷 연결, 보일러 고치기 등 한국에서는 기술자가 와서 당일에 뚝딱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미국에서는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거나 절차가 복잡하기만 했다. 춥기로 유명한 시카고의 한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 특정 보험회사의 절차에 따라야 해서 보름이 넘게 벽난로에 의지해 떨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친구와 이런저런 미국의 단점만 늘어놓으며 통화를 하던 중 늦은 나이에 미국 와서 마음이 떠돌고 있는 나를 걱정하던 친구가

“너 요즘도 불면증 있니? 한국에서는 내내 잠을 못 자고 힘들어했잖아 좀 어때?”하고 물었다.

“……”

친구의 질문에 짧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미국에서 불면증에 시달린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미국 온 후 나는 매일 너무나 잘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내가 잊고 있었구나! 한국에서는 중산층 동네에 집도 있고 우리 부부 살기에 충분한 것을 가졌음에도 늘 상대 평가를 하며 마음이 가난했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느라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했던 내가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살아가며 ESL 영어 학교와 도서관에서 하는 Literacy 수업을 무료로 받고 있고, 매일 6시에 퇴근 한 남편과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하고 주말이면 한국의 십 분의 일 가격으로 골프를 즐기고 있으며 미뤄뒀던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내 민들레 씨앗 하나가 나도 모르게 내려앉을 땅을 골라 뿌리를 내려 평안하게 아주 작은 새순을 내밀고 있었는데도 나는 계속 바람 탓, 영토 탓만 하고 단점만 찾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6개월만 따라가서 집도 구해주고 남편 혼자 살 수 있게 챙겨주고 한국으로 돌아와야지.’라는 생각으로 함께 미국으로 온 지 어느새 2년 반이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나 보다.
















윤정희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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