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M. Coetzee의 <추락>을 읽고
어쩌다 문학책 한 권을 읽었답시고 거창한 느낌과 교훈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그런 느낌이나 교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저자가 그런 교훈을 주려고 책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쿳시는 무슨 마음과 의도로 이 책을 썼을까? 통 알 수 없다. 문학은 한 편의 연극이다. 내가 읽는 전공책들은 저자의 집필 의도가 더없이 명확하지만 문학은 의도가 오리무중이다. 알 수 없다. 오래전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들은 적 있다. 그때 그는 문학에서 무슨 거창한 교훈이나 해석을 끄집어내려 하지 말라고 했다. 문학은 그냥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된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다.
소설은 대학에서 불명예 해임된 교수 데이비드 루리를 다룬다. 그의 전공은 문학인지 언어인지 아무튼 그쪽이다. 그는 수업 시간에 시답잖은 시를 해석하며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 그의 수업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들으면 틀림없이 지루할 것이다. 그는 여자에 집착한다. 여학생 중 하나를 붙들고 늘어지다 끝내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의 딸은 시골에 산다. 한 줌의 땅뙈기를 경작하는 농부다. 루리가 딸과 머물고 있을 때, 습격이 일어난다. 습격자들은 루리의 몸에 불을 지르고 그의 딸을 강간한다. 참혹하다. 그때부터 루리는 필사적으로 딸을 보호하고자 한다.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 같다. 페트루스. 좋은 이웃은 잠재적 적으로 돌변한다. 그의 딸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그는 딸에게 떠날 것을 종용한다. 딸, 루시는 거부한다. 그녀는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엇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위험한 습격자들이 득시글대는 땅, 한 줌의 농작물과 꽃을 기르는 땅에서 왜 떠나지 못하는가? 루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지 않는다.
루시는 페트루스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습격자들이 남긴 아이는 곧 태어날 것이다. 루리는 한층 늙었다. 그는 더 이상 명망 있는 교수가 아니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났고,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늙은 아버지일 뿐이다. 결국 루리는 딸을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소설은 종막을 맞는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남아프리카의 역사를 소재로 어쩌고 하는 거창한 해석을 늘어놓는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을 노골적으로 시행하는 정권이 오랫동안 군림했고, 90년대에 무너졌다는 것 정도. 소설에서 남아프리카의 역사가 중심 소재인 것도 아니다. 과하게 해석하면 역사가 그들에게 한 방 먹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흑인의 분노가 백인을 쳤다. 이 정도. 그러나 소설은 복잡하다. 하나의 해석으로 다룰 수 없다. 명확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 소설은 오묘하다. 오묘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오묘하다. 다른 소설도 읽고 싶다. 오묘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