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at Rest>를 읽고
졸리다. 지루하다. 눈이 감기지 않도록 한껏 치켜뜬 탓에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7할은 깨고 3할은 잠든 상태로 2시간을 버틴다. 이게 내가 수업을 듣는 방식이다. 이런 수업이 한 주에 못해도 12시간, 많게는 18시간까지 잡혀 있다. 수업은 말 그대로 고문이다. 교수가 수업을 잘 하든지 못 하든지 내용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억지로 집중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필기를 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수업은 고문이다. 간첩을 고문해 정보를 뽑아내려는 방첩요원처럼, 학교- 아니 국가는 학생을 고문해 지식을 욱여넣으려 한다.
나는 지난 15년간 수업을 들어 왔다. 절대 적은 시간이 아니다. 그 동안 내가 받은 ‘교육’의 풍경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똑같은 형태의 의자와 책상이 가득 찬 직사각형의 좁은 방. 교사가 걸어 들어와 커다란 칠판 혹은 화면을 통해 글자와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언젠가부턴지 모르겠지만(아마 수업시간에 수업은 안 듣고 국어책 뒷쪽에 수록된 옛이야기를 읽곤 했을 때부터) 나는 수업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 답답한 공기. 옴싹달싹 못 하고 갇혀서 지식을 주입당하는 기분. 자로 잰 듯 똑같은 교수자들의 수업 방식. 아, 나는 수업이 싫다. 지긋지긋하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대체 왜 이렇게 배워야 할까? 나는 수업이 싫어서 수업을 잘 듣지 않았다. 종국에는 공부도 소홀히 했다. 그땐 내가 게으르고 의지도 박약해서 공부를 못하는 줄 알았다. 내 탓만 했다. 물론 내 잘못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나는 삶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었고 이건 순종하여 참고 공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 극도로 고통을 주는 일을 참고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게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대학에 들어와서도 같았다. 나는 1학년 때 온라인 수업 대부분을 설렁설렁 듣곤 했다. 그 수업들 역시 끔찍하리만치 지루했으니까. 덕분에 2학년에 복학해서 공부하느라 애먹었다. 나는 내가 부족한 기초 과목들-미적분학, 정역학, 일반물리학 등-을 스스로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스스로 책과 씨름하면서, 나는 그 과목들을 훨씬 잘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가 잘 배우지 못한 과목들은 오직 수업을 통해 배운, 그리고 거기에 딸린 시험과 평가에 시달려야 했던 과목들이었다. 나 혼자 오롯이 공부하기 시작하자 그렇게 잘 될 수가 없었다.
결국 교육 방식의 문제였다. 수업은 근본적으로 내게 맞는 방식이 아니었다. 특히 코뚜레 꿰인 소처럼 교수자가 제시하는 진도에 질질 끌려가야 했던 방식이 아니라 내가 알 떄까지 머물러 있는 방식을 채택하자 훨씬 깊은 앎을 체득할 수 있었다. 배움에서 가장 필요한 세 가지 요소는 자의, 머무름, 무평가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그러나 지난 15년간 경험해 온 수업 방식은 타의, 채찍질, 혹독한 평가라는 요소에 더 가까웠다.
어쩌면 내가 독선에 사로잡혀 교육 체계를 무분별하게 비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피해 의식’ 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실제로 맞다. 나는 현 교육 체제 때문에 제대로 된 배움을 알지 못하고 고통받았으며 능력을 기를 기회도 얻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응은 내 몫이라는 것도 안다. 나를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교사와 교수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얼마 전 김갑진 교수의 대중강연이 열렸다.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다. 나도 그가 나온 영상을 여러 차례 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가 강연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카이스트 물리학 교수,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라는 말을 들을 법한 사람이 대학 시절 엄청나게 힘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해 1학년 때 F학점을 비오듯 맞았고 대학 생활 내내 힘들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로 인한 자괴감과 열등감 때문에 배로 힘들었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강연이 끝날 무렵 항상 가슴에 새기고 다닌다고 소개한 <중용>의 문구가 있다.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 일야. 누군가는 쉽게 익히고, 누군가는 어렵게 익히고, 누군가는 아주 죽을 고생을 하며 익히지만, 알고 나면 매한가지라는 뜻이다. 즉 지금 잘 안 된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란 뜻을 담고 있다. 그 말이 맞다. 획일화된 교육과정이 나라 전체의 교육을 지배하면서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누구나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알고 나면 차이가 없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제시하는 교육과정은 지식인을 대량생산하여 자본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략일 뿐, 절대로 개개인의 진정한 앎과 그 기쁨에 초점을 맞춘 체제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아이작 뉴턴의 전기 <Never at Rest>를 흥미롭게 읽었다. 뉴턴은 대학에 다녔지만 그가 다닌 대학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표준 교육과정이 있긴 했지만 학생들을 평가와 졸업이수조건 속에 족쇄처럼 묶어 두지 않았으므로 뉴턴은 대학에 있는 내내 자기가 관심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2020년대에 학교를 다녔더라면 과외활동 및 전공과목 공부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 일들을 모두 혐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적분학과 뉴턴 운동법칙은 결코 태어나지 못했겠지. 너무 편의주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뉴턴의 위대한 발견은 그가 오롯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학이 아니라 어머니의 영지로 끌려가 평생 양이나 치며 살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위대한 발견을 해냈을 것이다. 그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만 있었더라면. 내가 원하는 것도 바로 이거다. 제발 나를 그냥 좀 내버려 두라! 무슨 자격증을 따라느니, 전공필수과목을 모조리 듣고 좋은 성적을 받으라느니, 과제를 제출하라느니, 동영상 수업을 들으라느니, 수업시간에 빠짐없이 참석해 교수의 일장연설을 꼼짝 않고 들으라느니, 이런 소리 좀 하지 마라! 차라리 4년간 날 가만히 내버려 두라. 그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물리학과 수학 공부를 하겠다. 그럼 4년간 졸거나 한숨을 쉬며 수업을 듣는 것보다 훨씬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 후에 시험을 한 번 보던가 해서 실력을 평가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제발 가르치겠다고 나서지 마라. 나는 너희가 만들 수 있는 조립형 로봇이 아니다. 나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는 건 나뿐이란 말이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