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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는 쥐

바퀴에 짓눌리는 가엾은 영혼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by 생각하는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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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은 명확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다. 그런 책들에서는 내가 모르는 지식을 분명히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명확한 지식을 얻을 수 없을 뿐더러 대개 큰 재미도 없다. 적어도 '고전소설'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에서는 그렇다. 나는 이 소설들이 장황한 묘사만 늘어놓을 뿐 별로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어든 것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함이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배워야만 하는 학교 공부에 깊은 회의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던 차였다. 일 년 전쯤 이 책을 읽다가 별로 재미없다는 생각에 내려놓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훨씬 잘 읽혔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된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한스는 그 지방에서 촉망받는 인재이다. 교사들과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이 소년은 주 시험을 통과해 신학교에 들어가는 전형적이고 일률적인 출셋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의 과도한 기대와 '북돋음'을 통해 걷는 길에 대한 부담과 회의를 느낀다. 더욱이 그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낚시, 토끼 기르기, 산책 등 자신이 즐기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여차저차해서 신학교에 입학하는 데까진 성공하지만, 한스는 신학교 공부에서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학교 공부에 회의를 느끼는 하일너와 어울려 다니고, 시간이 지나며 점차 공부에 소홀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하일너가 학교를 이탈하여 퇴학 처분을 받자, 한스도 얼마 못 가 집으로 돌아간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스가 길에서 이탈했을 때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태도이다. 그가 주 시험에 합격하기 전과 주 시험에 합격한 이후 그의 아버지, 교장 선생님, 그 외 교사들과 목사는 그에게 무한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며 그를 북돋아 주었다. 다른 평범한 이웃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스가 신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자 신학교의 교사들은 응원과 격려에서 냉담한 태도로 돌아섰고, 한스가 집으로 돌아온 뒤 교장과 목사, 교사들은 그를 본체만체했다. 한스의 아버지는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진 않았지만 실망과 아쉬움을 드러냈고 그를 선망하던 이웃들은 비웃음을 보였다.


이는 한스의 주변 인물들이 보여 준 애정이 오직 그가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할 때만 유지된다는 걸 말한다. 즉 이들은 한스라는 인물의 내면이 아닌 밖으로 드러나는 '충실한 인재', '자신의 명성을 빛내 줄 아들', '자신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이웃' 등의 상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스가 이 상을 저버린 '실패자'가 되어 돌아오자 곧바로 관심과 애정을 끊어버린 것이다. 오직 독실한 구두공 아저씨만이 한스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 주었다.


한스는 이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움츠러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걷게 된 길에 회의를 느끼고 끝내 그 길에서 이탈했으나,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보여주는 실망, 멸시, 조롱은 그가 우울증에 빠져들다 못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었다.


사실 한스가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기계공이 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스는 기계공으로 살았어도 충분히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죽인 것은 주변인들의 시선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신부, 교장, 교사, 이웃들이 보여준 애정과 관심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으며, 한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차가운 멸시로 뒤바뀌었다. 즉 그들의 애정, 기대, 격려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한스가 어떤 기대도 받지 않았다면, 그래서 교장, 교사, 이웃, 아버지가 그에게 자신들의 기대를 투영하고 '격려'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한스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뛰어남'을 보였기 때문에 타인이 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기회를 주었고, 그렇게 그는 폭력 속에서 죽어갔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타인의 시선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한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과분한 호의와 기대가 결국 자신을 죽이는 칼날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한스처럼 뛰어난 인재는 아니었고, 그렇기에 아주 큰 기대를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 쏟아지는 기대는 분명히 존재했다. 부모님의 기대와 이웃들의 기대가 대표적이다. 그 기대를 충족시키려 노력함으로써 내 인생이 더 헝클어지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그러니 타인의 인정과 기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타인이 내게 보이는 기대와 실망은 그 자체로 나를 조종하려는 시도다.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대와 실망에 무감각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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