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무라 아키라, 『파선』을 읽고.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파선』은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에도시대의 고립된 어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난파선 사냥이라는 소개글을 본 순간부터 아주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슬프고,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재미있었다.
이야기는 아홉 살 어린아이 이사쿠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사쿠는 고작 아홉 살이지만, 외지에 고용 하인으로 팔려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꼬마 어부 노릇을 한다. 이 소년은 식량 수급이 극도로 어려운 어촌 마을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마을의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사람들은 계속 고용 하인으로 팔려 나간다. 아마 이사쿠가 태어나기 전부터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어쩌면 굶주림은 이 마을의, 나아가 당시 세계 전체의 전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굶주림을 잊은 건 고작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니.
끈질긴 고증으로 유명한 요시무라 아키라는 '궁핍하고 고립된, 에도시대 어촌 마을'의 생활상을 잔인하리만치 낱낱이 까발린다. 혼인 풍습, 가난, 굶주림, 가정폭력, 어업 방식 등을 읽다 보면 마치 그 시대가 우리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듯하다. 솔직히 안타까웠다. 나는 이토록 풍요롭게 사는데, 이사쿠는 어린 나이에도 끼니를 잇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니까. 새삼 인류가 누리는 풍족함이 정말 최근에야 찾아왔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아마 내가 백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이사쿠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으리라.
마을은 굶주리는 와중에도 단 한 가지 희망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아간다. 바로 언젠가 '뱃님'이 오시리라는 희망이다. 마을 사람들은 겨울밤마다 소금을 머금은 모래를 끓이며, 거친 날씨에 휘말린 배가 해안으로 다가와 난파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뱃님이 오셨다. 마을 사람들은 선원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기뻐하며 물자를 나눈다. 이제는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족을 고용 하인으로 팔지 않아도 된다고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보면 마음이 오묘해진다. 마을에는 정말 오랫만에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마을에 기묘한 배 한 척이 들어오며 지옥도가 펼쳐진다. 마을 사람들이 멋모르고 붉은 옷을 벗겨간 시체들은 사실 천연두 환자들이었고, 마을은 그대로 천연두에 휩쓸린다. 사망자와 신체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하고, 결국 촌장은 마지막 결단을 내려 감염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간다. 이사쿠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뒤를 따른다. 이제 이사쿠네 집에는 이사쿠 혼자 남았다. 이사쿠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며 고기잡이에 나서고, 그때 이사쿠의 아버지가 돌아오며 소설은 끝난다.
아주 잘 쓴 소설이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읽기 괴로운 소설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통에 특히 이입을 잘 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설 최후반 천연두가 마을을 휩쓰는 장면은 차마 책장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아마 공감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과학책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감정에 공감할 때, 실제로 신경세포가 공명하며 타인의 감정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 있다. 이 경우 내가 공감하는 대상은 실존하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공감한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다. 조금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속 인물에 공감한다니. 하지만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런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울고, 웃고, 화내고, 즐거워한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만,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근 십여 년간, '소설보다는 비문학 도서가 훨씬 훌륭하다. 소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 비문학은 실제로 지식을 전달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이 점점 옅어진다. 대신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소설에는 비문학에는 없는 다른 특별함이 있는 듯하다. 그 특별함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이야기이다. 비문학도 나름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비문학을 읽으며 울고 웃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문학의 이야기 구조는 어디까지나 독자를 활자 바깥 존재로 상정한다. 비문학은 지식을 끌어내는 대상이지 공감하는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독자를 활자 속으로, 그 서사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등장인물이 된다. 우리는 소설을 따라가며 울고 웃고, 결국 이야기 속에서 하나가 된다.
만약 내가 에도시대를 다룬 역사서를 읽는다면, 이만큼 공감하지는 못했으리라. 어느 어촌 마을에 지나가는 배가 난파하기를 기원하는 뱃님맞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그 마을에 천연두가 돌아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읽는다 할지라도 그 건조한 서술만으로는 내게 아무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파선』같은 소설로 읽으면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 상황을 따라가며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절절히 공감한다. 나는 그들 안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소설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 형태'가 아닐까. 그래서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설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배가 난파하기를 기원하고, 배를 유인하는 불빛을 피우고, 난파선의 선원들을 때려죽이는 풍습은 얼핏 보면 지탄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덮어놓고 비난할 수 없었다. 마을이 그토록 굶주리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옳은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필요악이라고 씁쓸하게 말하는 수밖에. 그렇다. 결국 생존이다. 굶주리는 인간에게 생존은 절대선이고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마법의 단어다.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운 순간, 어떤 행위라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이 소설을 읽고 기분이 좋지는 않다. 오히려 씁쓸하고, 괴롭다. 어쩌면 이런 기분 때문에 내가 소설 읽기를 기피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다시 소설을 배척하지는 않으리라. 왜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니까. 슬픔 속에는 사랑이 있고, 사랑 속에는 다시 내 모습이 있으니까.
자, 마지막으로 요시무라 아키라의 『파선』을 강력 추천한다. 에도시대 일본의 척박하고 고립된 어촌마을. 그 어촌마을에서 행해지는 생존을 위한 잔혹한 풍습, 그리고 그 풍습이 가져온 재앙을 직시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