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사람이 유리 벽 속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내가 감히 이 사람을 밖으로 꺼내어 볼 생각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완벽한 사람. 고민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외출했던 날, 나는 무려 네 시간이나 여자 친구랑 헤어진 얘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솟는 용기로 그가 있는 유리 벽을 두드렸다. 이상한 용기는 그를 나에게 데려다 놓았고 그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호숫가에 데려다 놓아도 햇빛 비친 물결보다 빛날 사람. 꿈을 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멈추길 바랐지만 시곗바늘은 계속 돌아갔다. 그를 유리 벽 속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렇게 꿈같던 시간이 끝나버렸다. 뒤돌아서 걸어가다 아쉬워 유리 벽 앞으로 뛰어갔지만 아무리 유리 벽을 두드려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그를 마네킹이라고 불렀다. 마네킹이라니. 나와 손을 잡고 밤길을 거닐던 그가 마네킹이라니. 계속 유리 벽 속 그를 보고 있으니 지나가던 여자가 옆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를 보았다. 그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인가 봐요?"
"마네킹이라던데요."
"방금 막 헤어진 연인 같은 얼굴이던 걸요?"
"마네킹이래요."
"마네킹은 속이 텅 비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담을 수 없어요. 그러면 마네킹이 아니게 돼 버리거든요."
마네킹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나에게 담긴 수많은 그를 되새겨 보았다. 어렵다. 마음에 남아 기억을 더듬으며 아파하는 편이 나은 건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늘 텅 빈 마음인 편이 나은 건지.
"그래서 마네킹으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항상 속이 비어있으니까 채워진 무언가 때문에 아플 일도 없잖아요."
여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미소를 짓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늦었는지 유리 벽 속 조명이 꺼졌다. 입김을 불어 사랑한다고 썼다. 미친 거지. 마네킹에게 사랑 고백이라니. 불빛이라곤 이제 가로등 몇 개가 전부다. 뽀드득거리며 걸어간 여자 덕에 눈이 오는 걸 알고 있다. 늦은 밤거리를 눈을 맞으며 걸어야 한다니. 더 늦으면 가로등마저 꺼지고 말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집으로 걸어간다. 아마 나는 밤길을 걸어도, 유리 벽을 봐도, 눈길을 혼자 걷게 되어도 그가 생각날 것이다.
"다시는 마네킹을 좋아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마음이 텅 빈 사람을. 다시는."
중얼거릴 때마다 입김이 나오고 속눈썹엔 눈이 쌓여 앞이 흐릿하다. 내 발걸음 소리만이 텅 빈 거리를 채우고 있다. 알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며 시간이 약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온전히 그를 기억하며 아픈 내 마음에 집중할 시간도 필요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는 경험을 마음속 책장에 꽂혀있는 앨범에 넣어 정리하고 덮어두어야지. 언젠가 열어볼지 영원히 덮어둘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코가 너무 시리다. 어서 집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