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해외여행까지 앞두고 있다면?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하던데 나는 코로나 시국 이후로 MBTI가 바뀌었다. 무려 ENTJ에서 ISFJ로 말이다. 계획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J만큼은 변하지 않는 나의 성향인가 보다. 사실 나는 파워 J까지는 아니다. 특히나 여행에서는 P의 즉흥적인 성향을 보일 때도 꽤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연애만 하면 나는 특대문자 J가 된다. 예전부터 그랬다. 소개팅에 나가면 만약 이 사람과 잘 되어서 결혼한다면 나의 2세 외모가 어떨지 까지도 상상하곤 했다. 결혼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애초에 시작부터 하지 않았다.
신종 바이러스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던 약 5년 전 나는 이별을 했다. 믿었던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 걸 알았을 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람도, 세상도, 사는 것도 싫어졌다. 코로나는 점점 심해졌고 정부에선 거리 두기를 하며 최대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했다. 안 그래도 운둔하고 싶던 찰나에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3년 내내 프리랜서로 일하며 소수의 꼭 필요한 사람들만 만났다. 그사이 나의 성격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나 보다.
다시는 열지 않을 것처럼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나였지만 세월은 그마저 느슨하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나의 마음에 노크를 하는 은상오빠에게 어느새 내 마음을 건네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연애는 여러 가지 상상과 계획을 하게 했다. 게다가 터키여행까지 앞두고 있으니 J인 나는 계획하고 준비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립글로스를 새로 구입했다. 남자친구 생겼으니 앞으로 키스할 일이 있을 거야! 그런데 오래된 립제품을 바르고 나갈 수는 없잖아? 이건 새로 만난 연인에 대한 나의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카파도키아 열기구가 아닐까 싶다. 이것 때문에 터키여행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인과 함께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로맨틱해 미칠 지경이었다. 풍선이 '두둥' 떠오를 때 그의 등에 조용히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려야지! 그리고 휴대폰에 문자를 살포시 남길 계획이다. '이렇게 멋진 곳에 함께 와줘서 고마워요.'라고. 나는 그 순간 함께 들을 음악까지 미리 선곡해 두었다. 바로 싸이의 '예술이야'. 그 장면에 딱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완벽한 계획이다.
♬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야
죽어도 상관없는 지금이야
심장은 터질 듯이 예술이야
<PSY - ‘예술이야’>
쇼핑도 많이 했다. 밤에 바르고 자면 각질을 없애 매끈하고 부드러운 입술로 만들어 준다는 꿀이 들어간 립밤도 사고 사진에 잘 나올 것 같은 원피스와 쪼리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친구들 나눠주라고 지인이 만들어준 네잎클로버 키체인도 잊지 않았다. 가방도 4개나 챙겼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 가는 날을 위한 예쁜 핸드백, 캐주얼하게 맬 수 있는 에코백, 검은색 옷에 포인트가 되어 줄 주황색 크로스백, 여름에만 들 수 있는 구멍 송송 뚫린 가방까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의 캐리어는 20kg에 육박하게 되었다.
'분명 오빠가 들어준다고 할 텐데 이렇게 가방이 무거우면 미안할 것 같은데...'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 먼저 도착한 나는 캐리어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처음 같이 하는 여행에서 혹시라도 그가 힘들까 걱정이었다. 여행에서의 짐은 말 그대로 짐이 된다는 걸 수많은 여행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인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그랬을까? 짐을 줄이기가 어려웠다. 혼자 유럽여행 갈 때 고작 12kg였던 내 캐리어에는 도대체 무얼 넣어 갔던 걸까?
혼자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니 보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우리의 첫 여행은 어떤 여행이 될까? 예쁜 추억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추억을 기록할 수 있게 중간중간 브이로그 형식으로 영상도 찍을 생각이다. 귀국하면 멋지게 편집해서 선물로 줘야지! 물론 어디에 올리거나 공개할 생각은 아니고 개인 소장용으로만. 5년 만에 연애를 하게 된 J인 여자는 공항의자에 앉아서 끊임없이 계획과 상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고 드디어 기다리던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착륙. 어디예요?
-짐 찾는 곳으로 와요. Welcome to Istanbul!
우리는 그렇게 이스탄불 공항에서 만났다. 두 명의 또 다른 주인공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