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야 남을 더 사랑하게 됨
우리의 마음 구조가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완벽주의이며 불안감이 높은 사람은 남편이나 부인에게 간섭이 심하고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남보다 대책 없이 게으른 사람은 어린 시절에 긍정경험 대신 좌절과 무기력감을 습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보다 자신은 우월하다고 믿고 타인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이용하고 돈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가 선민의식을 심어주었거나 지식습득을 잘한 덕분에 우등생으로 살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느낌을 배우지 못합니다. 또 원칙 없이 칭찬에 길들여져 자랐다면 비난에 민감하여 쉽게 분노하고 위축되며,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을 맹신하는 태도 때문에 터무니없는 사기를 당하거나 사이비 교주의 갑질에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침체된 관계를 분석해 보면, 문제해결 능력이 없는 반복된 대화에 지쳐 결국 속으로는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라고 느끼다 포기하고 체념하고 살아갑니다. 에너지의 전환과 해결을 위해선 해결을 위한 마음과 에너지를 모으거나, 외적인 환경의 변화 즉 외부 에너지의 변화에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반드시 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고 이 장애물을 내려놓으면 소통이 됩니다. 막힌 물길의 쓰레기를 치우면 강물이 흐르듯이 내 마음 구조나 타인의 기본 심리학은 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 나라는 에고에만 충실해, 내 감정이 타인의 감정보다 우선이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한치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옹호하다 보면 ‘모든 일어난 일들은 내가 참여’한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무지가 불통을 가져옵니다. 내가 변해야 주변이 바뀌고, 나의 한 마음과 한 마디가 주변을 밝히는 것을 체험해 보면 내 안의 신성의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식이 깨어나 마음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시에 존재하며 드러나는 방식은 정해진 규칙이 없습니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듯이 단정적인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진리와는 먼 죽은 사고방식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 생존에 내 의지와 결단 그리고 따뜻한 마음의 지속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명철한 판단과 준비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타인도 사랑 안에서 감응하게 되어 함께 성장하고 행복의 가능성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린 모두 신성 안에서 평등한 생명임을 인정하고, 인정받을 때 행복합니다. 현상의 인과를 알면 해결책이 보이고 정견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 나이와 성별을 넘어 인간이 평등한 존재 임을 알게 됩니다. 이를 알면 깨어서 말하고 행하게 됩니다. 사랑은 인내심과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인내심보다 긍정적이고 지혜로운 개념은 ‘신뢰를 갖고 지켜보고 지지함’입니다.
사랑의 길은 이렇게 이기적인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깨어서 바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나의 마음을 깨고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내 생각에 대한 타당성 검토, 현재 감정에 대한 정당성 등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발견·통제·판단하는 힘이 자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인정되고 미운 사람의 상처가 이해된다면 내가 성장한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마음이 바늘 끝처럼 날카롭고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린다면 자신으로 돌아와 성찰하고 삶을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을 일시적으로 속여서 생각 바꾸기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상황이 악화되면 머리로 이해된 얄팍한 것들이라 무너집니다. 마음이 마음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정직해지고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면해 탐구해야 책임있게 나를 돌보는 사랑으로 자랍니다. 나의 주변을 심각하게 해하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주장하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사회를 다루는 태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무시하기 보다는 잘 활용해 그 과정에서 배우고 깨우치는 것이 살아 있는 체험입니다. 지나치게 고통스런 체험을 자주 허락하며 산다면 회복이 어렵고 깊은 좌절의 반복은 명상이나 지성으로도 깨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자신의 삶을 너무 힘들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삶이 사랑 안에서 하나씩 풀려갈 때 실제로 사랑의 능력이 자라 예전의 나와는 달라질 때 진정 자기사랑이 깨어난 것입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주고 가슴으로 행복감과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면 실체화된 것이며 현실에서 구체화되어 삶을 변하게 하는 힘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자라고 작은 일들은 쉽게 이해가 되며, 중요한 일들은 숙고하여 지혜롭게 다수의 상생을 위해 노력하며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나라고 하는 작은 마음의 고집 속에서 분노와 분별로 벽을 세우고 비난하는 마음이 자라고 있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감정도 장사꾼의 마음에 점령당하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문화의 가장 큰 병폐는 대가 없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입니다. 우린 우리 자신이 어떠하던 조건 없이 사랑의 가능성을 믿고 키워가면 분열된 마음에서 통합된 하나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여러 개일 때 갈등이 생기고 결정장애로 힘이 빠집니다. 하나의 마음이 될 때 성취를 향해 가는 지름길이며, 하나의 마음이 비워질 때 평온한 의식과 만납니다. 사랑의 힘은 상대성을 극복하게 합니다. 상대의 싫고 좋음을 견주기보다는 수용하고 하나로 만들어가면 깨어납니다. 인간의 성장은 이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깨어나 주변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사람인가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사랑의 성장은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을 일깨우며 동시에 친구와 가족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주기 마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대는 늘 존재하며 합일을 향해 진보의 역사는 열려 있고, 인간의 역사는 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는 선한 사람도 악인도 있어야 할 이유가 있고 모든 현상은 우주근원 원리의 조화 속에서 정반합의 과정으로 흩어지고 모이는 과정일 뿐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반야심경을 진리를 꿰뚫는 법문으로 색즉시공은 모든 만물이 본래 꿈이고 비어있지만 동시에 텅 빈 그것이 모두 의식의 드러남이란 뜻이지요. 본래 안팎이 하나인데 그동안은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고 설명을 한 것은 분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색즉시공 만 깨우치는 것은 반쪽이며 불완전합니다. 공즉시색이므로 우리는 신이며 모든 것을 행할 자유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은 공한 것에서 나왔으나 가득 찬 생명력이고 만물을 키우는 생명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 속에 잠기는 능력은 이런저런 변명과 핑계를 대며 조잘대는 마음만 제어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궁극의 사랑의 완성은 끝이 없으나 우주의식의 보호 안에서 본성은 그대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서두르지 않고 그냥 쉽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긍정하면서 즐겁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궁극과 존재에 이르는 나의 길입니다. 사랑의 성장 속도의 차이는 전생과 이생의 경향성에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지성의 길과 명상의 길을 참고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마음을 연다면 이치를 꿰뚫어 자신이 살아온 조각조각난 경험들이 하나로 정립될 때가 옵니다.
마하리쉬가 당신은 있는 그대로 깨달은 존재이고 우린 모두 깨달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때 있는 그대로란 마음이 아니라 존재를 말합니다. 누군가는 깨달으면 감정이나 생각이 없으니, 즉 ’무아와 공‘인 존재 안에 머문다면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