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솔샘역에서 북한산 생태공원까지

by 노크

추적추적 빗물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내린다. 어제 자기 전에 본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 올 확률이 80%였는데 정말 비가 온다. 어쩐다. 오늘은 서울 둘레길 8번째 코스인 북한산 둘레길을 걸을 계획이었다.

지난 5월에는 초행길이라 북한산 우이역에서 북한산 둘레길 탐방 센터까지 밖에 걷지를 못했다. 이번에도 긴 구간을 다 걷기는 어려워 두 번에 걸쳐 걷기로 계획하고 구파발 천에서부터 형제봉 입구까지 약 7시간 13km를 걸을 계획이었다. 7시간을 걷는 게 조금은 무리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동안 걸어본 경험에 의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나저나 그 모든 계획이 내리는 비로 무산될 위기다. 묘안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서 혹시 시작하면 비가 좀 잦아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그 와중에 빗소리는 점점 커졌다. 답답한 마음에 우산을 들고 한강공원으로 나갔다. 여름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우산에 내리 꽂힌다. 신발에 빗물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바지도 젖는다.

비가 쏟아지는 한강을 바라보니 희뿌연 물안개 속에서 저만치 강남의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비 오는 한강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번 서울 휴가 계획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렸다. 모든 계획을 완벽하리만큼 세워 순천에서부터 서울까지 왔는데 지난번 골절된 갈비뼈가 아직 아물지 않아 자전거도 탈 수 없었고, 친구와 수원화성 둘레길을 걷기로 하고 시작은 했으나 얼마 못 가 친구가 덥다는 이유로 둘레길 걷기는커녕 그저 산책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계획으로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려 했는데 비가 이렇게 많이 오면 갈 수가 없고, 가더라도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다. 한강을 바라보는 마음이 심란했다. 그런데 저만치서 사람이 온다. 우산이나 우비도 없이 50대 초반쯤의 여자가 빗속을 달린다. 이어 10분 정도 지나니 60대 초반의 남자도 달리고 있다. 각각의 사람이지만 그들은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순간 그들을 향해


“파이팅! 존경합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지금의 상황에 화가 잔뜩 나서 투덜거리고 있는데 저들은 상황을 개의치 않고 이미 달리고 있는 것을 보니 순간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들을 보고 용기를 얻었음에도 이 빗속에 둘레길을 걷는다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에 곧 마음을 뺏겼다. 둘레길을 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순천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래도 내 집이 최고니. 하지만 ‘어떻게 온 서울인데 그냥 갈 수 있나? 비를 피해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갈까? ’ 생각도 했지만, 마땅히 마음이 가는 전시회도 없었다.


‘어쩐다~ 그래도 늘 시작하면 후회하지 않았는데 벌써 포기하는 건 이른데. 비가 그치는 상황을 지켜보고 천천히 결정하자’라고 스스로 말했다. 그러는 사이 몸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까진 30도 가까운 여름 날씨였는데 지금은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진다. 준비해 온 옷이 전부 여름옷인데. 설령 둘레길을 간다고 해도 저체온이 될까 염려스럽다. 여전히 이런저런 핑곗거리만 찾는 날 또 발견한다.


다시 일기예보를 뒤져보니 11시 이후엔 비가 잦아든다고 하니 용기를 내 시작을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들 원룸으로 돌아와 옷을 입고 가방을 싼다. 비가 오는 1시간 동안은 전철로 이동을 하고 본격적으로 둘레길을 시작하는 시간에는 비가 그칠 것을 간절히 소망했다.


드디어 출발


가벼운 차림에 우산을 들고 전철을 탔다. 시작지점에 내리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좋다. 가 보자. 그렇게 시작된 서울 둘레길은 시작 시각이 계획보다 늦어서 코스를 변경해야 했다. 솔 샘 역에서 내려 형제봉 입구까지 갔다가 평창동 길을지나 북한산 생태공원까지 11.4km. 약 5시간을 걷는 길이다. 오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총 7시간이고 서둘러 돌아와 샤워 후에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내려가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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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하다. 비는 계속 오고 스틱도 없다. 네이버 지도를 따라 흰 구름 길 시작점으로 갔다. 서울 둘레길 북한산코스는 스탬프가 6개 있다. 오늘 걷는 코스에서 스탬프를 3개 찍어야 한다.


북한산은 서울 사람들에게 특별한 산이라 주말에는 많은 인파가 오르내리는 산이다. 그래서 혼자 가는 길이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으로 토요일에 둘레길 걷기를 계획했는데 오늘처럼 비가 오니 사람들이 거의 없다. 흰 구름 길 시작점의 스탬프를 어렵지 않게 찍고 그곳에서부터 형제봉 입구까지는 가벼운 뒷산의 둘레길이었다. 비는 소강상태였고 우산 없이 걷기에도 충분했다. 다행이다. 내린 비로 습해진 산은 온몸을 땀으로 범벅이게 한다.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안경의 습기를 닦아내면서도 흐르는 땀이 싫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 걸으며 땀 흘리고 싶어 연가까지 내고 순천에서부터 이곳까지 오지 않았나? 하고 싶은 이것 비 때문에 못할까 봐 아침 내내 얼마나 투덜거리고 자신에게 화를 냈나? 이거하고 싶어 서둘러 전철을 타고 마음조이며 이곳까지 오지 않았나? 그래 맞다. 이렇게 땀 흘리며 걷고 싶어 안달이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도 나의 이런 걷기 중독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서울에 갔으면 친구 만나 맛있는 거 먹고 적당히 즐기며 놀다 오지 왜 서울까지 가서 둘레길을 걸어하고 자전거를 종일 타야 하냐고 구박을 한다.


서울 살 때는 아이들 키우고 자식 노릇 하며 사는 게 바빠 남산 한 번 못 갔다. 그런데 이제 부모님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다 커서 내 품을 떠나 시간이 남는데 하필 나는 순천에 있다. 순천 주변의 섬진강이나 지리산 둘레길은 이미 걸었으며 멀리 신안이나 남도의 갈만한 곳도 다녔다. 그래서 서울에 다니러 올 때마다 나름의 계획과 목표를 갖고 오는 것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사대문을 이어주는 서울성곽 길은 작년에 다 돌았고 이어 서울 둘레길을 시간 될 때마다 걷고 있다.


왜 이렇게 걷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걷는 걸 좋아하는 걸까? 정해둔 목표를 이루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뭐 두 개 다일 수도 있다. 이렇게 걷고 나면 계획했던 목표를 이룬 것에 뿌듯하다.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갔다는 것도, 길과 길이 이렇게 연결되고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이 길을 지나면 또 어디와 연결될까?’ 하는 호기심은 나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40년 가까이 살았던 서울을 먹고 사느라 잘 몰랐는데 이렇게라도 새로운 길과 동네를 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 동네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직접 가본 것과 지도로만 보는 것은 완전 다른 느낌이다. 그것이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까? 내가 지나온 길을 지도를 펴놓고 살펴보면 그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있던 나무와 돌들 그리고 갈림길까지도.


걷기의 또 다른 매력은 걸을 땐 잡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한다.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긴장하며 나에게만 집중한다. 그렇게 걸으며 흘리는 땀은 되려 시원하다. 몸 안에 있는 노폐물이 밖으로 배출되는 기분이고 더불어 마음의 찌꺼기까지 씻어내는 기분이다. 사우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청량감이다.


흙을 밟을 때의 잔잔한 느낌. 코끝을 스치는 숲의 냄새, 아주 가끔 만나는 계곡의 물소리 그리고 바람과 함께 춤추는 초록 잎의 향연까지. 그 자연의 날 것들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혼자 걷고 있지만 혼자가 아니다. 나보다 먼저 앞서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때론 뒤에서 따라온다. 숲의 친구들이. 그뿐이랴 이름 모를 새들의 합창과 까막눈을 껌벅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청설모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이 주는 그 무엇들이다. 그래서일까? 숲에 있을 때는 마음이 맑아지고 가슴에 시냇물이 흐른다.


그러나 정말 순수하게 자연이 좋아서 걷는 걸까? 무슨 결핍을 대체하기 위해 걷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상처가 나를 숲으로 이끄는 걸까? 왜 이곳에서 안식을 얻는 걸까? 거창하게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이 있는 자연이 좋아서라는 개똥철학 같은 이유 말고 말이다.


사람에게 지쳤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가면을 쓰며 부대끼고 내 맘 같지 않은 관계에 삐걱거리기 때문이다. 내 옷에 붙은 사회적 명찰 몇 개 때문에 공동체를 떠날 수는 없고 무턱대고 가면을 벗어던질 수도 없어 숨 쉬러, 가면을 벗어던지러, 날것의 나를 만나러 이곳에 오는 것 같다. 걷다 보면 누가 말해줄 것 같아라고 했던가? 때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모르기도 하고. 그게 또 인생이 아니던가?


형제봉 입구를 내려오니 두 번째 인증센터가 있다. 빨간 옷을 입고 서 있는 인증 우체통은 혼자 숲길을 걷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 가방을 뒤져 수첩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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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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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뭐라고’ 하면서도 인증도장을 찍는 일은 은근히 재미있다. 이 도장 하나가 ‘잘 왔다고, 수고했다고 ’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품에 달려가 안기는 것처럼 인증 우체통을 찾아 달려가는 나는 아이다.


형제봉 입구에서는 평창동 길을 지나고, 옛성길을 지나 북한산 생태공원까지 가야 세 반째 인증도장을 받을 수 있다. 평창동에서 내려다보는 시내는 북한산에서 내려다보는 시내만큼 풍광이 좋다. 물안개 속에 갇힌 시내는 잘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맑은 날 이곳에서 시내를 바라보면 다빈치 언덕에서 피렌체를 바라봤던 것 같이 아름다울 것 같다. 어느 도시건축학자가 그랬다. 부자들은 높은 곳에 산다고. 차가 있어야 살 수 있는 곳이기에.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평창동 길의 모든 집은 TV 속에서 보았던 집들이다. 집인지 갤러리인지 모를 듯 아름다운 집들은 건축대상을 받은 집 인증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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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찍고 집 구경도 하며 천천히 걷는데 숲길에서 접질렸던 발이 아파지기 시작한다.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도 통증을 호소한다. 답답한 등산화에서 나가고 싶다는 신호다. 아무 데나 걸터앉아 양말을 벗고 발을 만져준다. “고생 많았지” 하며. 마음 같아서는 더 걷고 싶은데 나의 인생은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다. 앞으로 많은 날이 남아 있다. 때론 내려놓고 접어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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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신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걸으면 한 시간인데 버스를 타니 한 정거장이다. 마지막 인증도장을 받기 위해 북한산생태공원 입구에서 내려 인증도장을 받았다. 끝까지 걸어 받은 도장이 아닌 한 정거장 버스를 이용해 받은 도장이라 마음은 조금 찜찜하지만, 다음에 구파발에서 걷기 시작하면 그때 못 걸은 구간을 걸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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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온몸에 쉰 냄새가 진동하지만, 오늘도 걷기를 잘했다고 나를 칭찬한다. 반면 인생은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과 때론 돌아가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것도 다시 한번 배운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는 없다는 것도 말이다.




2024년 6월 6일~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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