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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걷기의 시작

50년전의 일기장에서 부터

by 노크


6월 말 퇴직을 앞두고 한 달 정도 쉬는 여유가 주어졌다.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켜고 서핑 중에 카톡

쪽지창이 올라왔다.

“순* 씨 시간이 되면 전화 한번 주세요.
번호는 ******입니다.”

순간 ‘어? 이 사람……. 세상에’

무슨 일이지? 하는 마음과 반가운 마음에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같은 과 1년 후배지만 나와는 동갑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35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연락 한번 못했는데 반가웠다. 오랜만의 통화라 처음에는 서로 존칭을 했지만, 자연스레 대학 시절의 동기로 돌아갔다.

그는 전공과 다른 그의 세계에서 열심히 살았더라.

나 역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 세월에 대해 긴 통화를 했다.

얼마 전 자신의 대학 생활을 회상하다 보니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그리고 퇴직을 앞둔 시점인 것 같아 연락처를 수소문해 조심스레 연락한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보자는 여운을 남기고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도서관에 올라와 자리에 앉았지만, 창밖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난 어떤 것에도 쉬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전화 한 통으로 30여 년 전의 대학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묘한 기분으로

그 시절의 많은 추억이 도서관의 허공으로 카드처럼 날아왔다 사라지곤 했다.

집에 돌아와 베란다 창고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허름해진 과일 상자 속에 오랜 세월 묵힌 장처럼 일기장은 먼지와 함께 고된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결혼 전 여러 이름으로 주고받았던 편지는 모두 태웠지만,

일기장은 차마 태울 수가 없었다.

이사 다닐 때마다 버리지도 못하고 번듯한 책꽂이에 꽂지도 못하였지만 늘고해성사 처럼 품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꺼내 보지는 못했다. 서글픈 세월을 꺼내 읽으면 다시 그때의 서글픔으로

내가 물들까 봐서였을까?

먼지를 털어내고 고서를 꺼내듯 소중히 한 권씩 꺼냈다. 누렇게 색이 바랜 것은 물론 쾌쾌한 종이 냄새가

배어 나온다. 몇몇 일기장은 볼펜이 휘발되어 글씨조차 흐릿흐릿하다.

1975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썼던 일기들이 반백 년 동안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 아니 나의 역사가 한 권 한 권씩 소장되었다고 하자. 30년 만에 전화해준 친구 덕분에 고해성사처럼 부끄러웠던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워 일기장을 펼쳐보게 된다.

흐릿한 기억 속의 추억들이 일기장에는 어떻게 선명히 기록되어있는지 궁금했다. 그동안은 일기장을 펼쳐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에도 바쁘고 벅찬 내 일상에 옛 추억을 꺼내 읽을 만큼 여유로운 성격이 못됐다. 그렇담 이젠 여유가 생긴 걸까? 아니다. 순간

그래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에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초등학교 때의 일기는 제법 의젓했다. 일기를 쓴 게 아니라 글짓기를 했고, 웅변을했더라. 보여주기 위한 일기였다. 어른 흉내를 냈고 아는 척을 했다. 어떤 날은 일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또 어느 때보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는지 나라 걱정을 하는 뭣도 모르는 애의 일기였다.


중고등학교의 일기는 파란만장하다. 사춘기의 오두발광 한번 없이 그 시절을 보냈다고 부모님은 나를 칭찬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난 사춘기의 발광을 일기장 속에 고스란히 숨겨두었을 뿐이었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어 창피한 부모를 힐난했으며, 바람 잘 날 없던 여러 형제를 미워하고 욕했다. 선생님이라고

내 눈에 곱게만 보이지 않았나 보다. 강압적인 학교 제도를 탓했으며 차별하는 선생님을 탄원했다.

삐뚤어지고 열등했던 사춘기의 감정들을 일기장은 고스란히 품어주고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낮은 자존감으로 자주 외롭고 고독했다. 휘 갈려 쓴 글자 하나하나가 그런 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외로움과 죽음, 우울과 가난을 떼어놓고 나를 말할 수 없었던 일기장 속의 내 모습과는 달리 학교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려 애썼던 여고생의 모습 또한 아주 쓸쓸했다. 그 시절 좋아했던 시와 노랫말은 일기장 속에서 내 상한 감정을 치유하고 작아진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든지 신형원의 유리 벽이라든지….


미성년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난 대학 시절은 좀 나았을까? 외사랑을 했던 나는 사랑도 아닌 사랑에 목을 맸다 풀었다, 떠났다 돌아왔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내가 다가가면 그는 멀리 도망갔다. 내가 돌아서면 그는 어느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게 사랑이었을까? 따듯한 입술 한번 포개보지 못한 우리의

사랑은 서로의 주변만 맴돌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번 못하고.

말하고 나면 우리 사이를 묶고 있던 실오라기마저 끊어질 것 같았다. 그저 지금처럼만이라도 라는 생각에

매달렸던 나는 7년을 아파했다. 그때의 일기는 그에 대한 애증과 밤마다 토해낸 서글픈 외사랑의 한탄으로 강이 넘실거렸다. 그와 헤어진 후 나의 마지막 일기에는 조지훈 님의 시 한 편이 적혀있었다.


사랑을 다 해 사랑했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후 일기들은 아이들 낳고 키우며 너무 행복했던 육아 일기가 주를 이루었다. 모든 시간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충만함과 낳고 키우면서 아이들이 준 기쁨과 소소한 날들이 일기장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물론 IMF를 지나며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과 부부의 애환도 고스란히 담겨있더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의 암 발병과 수술, 연이어 친정아버지의 암 발병과 돌아가시기까지

함께 울었던 세월이 눈물 자국으로 흐리 흐리하다.

일기를 읽고 나니 지나간 50년이 한 편의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잊고 살았던 세월의 내 역사.

다시 주섬주섬 지난 세월의 일기장을 상자에 넣고 책상에 앉아 지금의 일기장을 펼친다. 요즘은 일기가 아닌 週 錄이 때론 月 錄이 될 때도 있다.


일기를 쓸 때마다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담? 내가 뭐 훌륭한 사람으로 자서전을 낼 것도 아니고. 일기장엔 좋은 일이나 잘한 일보다는 늘 속상하고 힘들고 화난 일들만 가득한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지난 일기를 읽어보며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의연히 잘 살아온

나를 발견하고 매일 매일 쓰는 일이 얼마나 나를 성장시켰는지를 알게 되었다.


꾹꾹 한글자 한글자 눌러 쓴 글씨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다 잡으려 발버둥 쳤던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매일매일 쓰는 과정을 통해 주관적인 감정이 아닌 한발 떨어진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보려 애썼던 그것 같다. 버선목이라도 뒤집어 보여주고 싶은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썼던 일기는

불같은 분노를 고요하게 해주며, 휘몰아치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준 일기장 덕분에 어느새

나의 마음은 말간 호수가 되어있었다. 끝없는 반성과 후회와 새로운 다짐이 매번 일기장을 도배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다.

《오늘 커피 한 잔 어때요》의 작가 장진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들을 분출시키면서 쌓아두지 않고 처리해가는 과정이며 마음에 쌓아둔 감정의 불량재고품들을 쓰기를 통해 신속히 배출하여, 새롭고 즐거운 감정들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면서 과거의 기록을 쌓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일기는 과거의 기록이 하나씩 쌓이는 과정이다.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사람들은 역사라 부른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다. 지혜로운 누군가가 history라고도 했다. 나의 일기는 나라는 사람의 역사다. 나는 나의 역사를 써가는 위대한 삶을 살고 있었던 거다. 내세울 건 없지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한 뼘 더 성장한 내일을 기대하는 내가 이 정도면 괜찮다. 성실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때론 즐거웠으며

앞으로도 그럴 내 모습이 기대된다.


책을 읽으며 일기를 쓰고 자연을 벗 삼아 걷는 일은 인생의 여정에 오래 함께할 좋은 친구들이다.

이제 퇴직후 나의 삶은 읽기와 쓰기와 걷기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동안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좋아요를 눌러응원해주신 많은 작가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이라 어찌해애 할지올랐는데 많은 응원으로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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