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에서 벨이 울린다.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딸-”하고 불러본다.
울다, 웃다 두 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매일 카톡을 주고받다가 일주일째 연락을 못 했는데
반가운 마음으로 긴 통화를 했다.
딸은 이 국 만 리 영국에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하러 작년에 한국을 떠났다. 1년 과정인 석사과정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과제를 제출하고, 시험을 치르느라 바빴단다.
우리 나이로 서른한 살. 적지 않은 나이로 멀리 이국땅에서 공부하겠다고 선포했을 때 우리는 반신반의였다.
딸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평범한 일 중에 하나지만
그 과정처럼 위대하고 기적 같은 일은 없다.
선남선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모든 가정은 위대하다.
결혼 후 임신 소식에 가족 모두가 기뻐하며 축복했다. 기쁨도 잠시 난 하혈을 했고 병원에서는
자궁 외 임신이라고 했다. 의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아기가 자랄수록 아기도, 엄마도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어요. 산모와 아기를 위해 임신중절을 권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는 것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느껴지지도 않는, 이제 겨우 주먹만 한 생명일 텐데 그 아이가 뱃속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을 나오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밥 생각도 없었지만, 식당에 들어가 제일 비싼 음식을 주문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기를 위해서였다. 울음을 삼키며 음식을 삼켰다.
가족들과 함께 논의 한 끝에, 생명을 주관하는 분께 모든 걸 맡기고 아기를 끝까지 지키기로 했다.
전문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으며 오로지 아기에게만 집중했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했고 우리는
아기 만날 날만 손꼽았다.
열 달이 지나 유도분만을 위해 침대에 누웠다. 진통이 시작되고 12시간 30분이 지난 후 난 정신을 잃었다.
위급해진 상황에 의사는 급하게 수술을 진행했다. 아기는 입에 긴 호스를 걸고 인큐베이터로 들어갔고,
난 사흘 동안이나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했단다.
퇴원하고 아이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릴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난 아기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어린것이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우리에게 와줬네. 대견하고 고맙다. 아가야.’
아이는 자라며 누구보다 영민했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영국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휴학하고 돈을 모아 한 달 넘게 배낭여행을 하고 왔던 딸이라 아이를 믿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걱정이 많았으나 2년의 워킹 홀리데이를 안전하게 마치고 돌아왔다.
만남의 반가움도 잠시 딸은 새로운 포부를 선포했다.
“엄마, 나 영국으로 유학 갈래요.”
“유학 가고 싶어요”가 아닌 “유학 갈래요”였다.
워킹 홀리데이 기간 동안 딸은 유학생들을 보며 새로운 꿈을 키웠나 보다. 대학원 입학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영어인증이 필요했다. 탈모증세가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공부한 결과 원하는 점수를 얻고
원하는 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결혼을 위해 조금씩 준비했던 적금을 깨서 작년 9월 유학길에 올랐다.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과정의 막바지에 이르렀단다.
부모를 떠나 구만리 이국땅에서의 삶이 어찌 쉽고 편안했으랴. 학비 외에는 방세조차 보내주지 못했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느라 어디 공부가 제대로 됐을까 싶다. 대부분 유학생은 부모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학업에만 매진하는 때도 있고 재정지원이 너무 풍족해 학업조차 관심이 없어 부모의 눈을 피해
자유를 누리기에 바쁜 아이들도 있단다.
딸은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생활비와 방세를 낸다. 그런 상황에서 딸은 너무도 대견하게 실력을 쌓아갔고 마음의 크기도 키워갔다.철없던 사춘기 때 딸은 심하게 반항을 했다.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해?”
“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부모의 직업과 무능력에 포악으로 항변했고, 차갑고 냉소적인 태도로 부모의 가슴을 찔렀다.
자발적 청빈을 선택한 목회자의 삶이 아이들 눈엔 가난과 무능으로 비쳤을 거다. 누구의 딸이라는 이름이 그를 억압했고 속박했다. 때론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모습에 갈등했을 것이다. 그래도 거리에서 헤매지 않고 집에 있어 줘서 감사했다. 그랬던 딸아이가 이제는 어른이 된 듯 말한다..
“엄마 내 삶은 내 몫이야. 부모를 탓하거나 환경을 탓할 나이는 이제 지났어. 지금까지 잘 키워줘서 고마워”
삶에는 정답이 없다. 개개인의 삶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때가 있다. 다만 자기 삶의 가치를 찾아 앞길을 개척해 가며 살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기특하다.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행길에 자주 올랐던 딸은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의 자격을 갖추어 웰라이프를 하고 싶다는 딸은 영국에서의
삶을 희망한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보고 싶고, 가까이 두고 싶지만, 아이의 미래는 우리의 삶과는 다르다.
세계 구석구석 어디서든지 뿌리내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런 딸의 삶에 무한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전에 딸이 이런 말을 했다.
“엄마 그거 알아? 워킹 홀리데이 때 만났던 애들이 자기들도 유학생으로 영국에 다시 오고 싶다고 했지만 나 외에는 아무도 온 애가 없어.”
“그랬구나. 너 정말 멋지다.”
양희은 씨의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다.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사랑하는 딸 하은아, 너도 너의 삶을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