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길을 가라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학교 다니는 내내 미술 시간이 그 어떤 시간보다 싫었다.
여행 중 몇몇 미술관을 둘러보며 알지 못하는 그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도서관에서 그림에 관한 책을 빌려보며 명화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게 됐다. 소위 아는 만큼 보이는 기쁨 말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화가에는 고흐가 단연 으뜸인 것 같다. 나도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의 삶을 이해하고 나니 그의 그림이 더욱 가슴으로 느껴진다. <별이 빛나는 밤>,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등등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이다. 그중에 나는 <꽃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그림을 좋아한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그림은 고흐를 응원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던 동생 테오가 아들을 낳았을 때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다. 눈부시게 화사한 봄을 묘사한 그림은 생후 2주 된 조카의 침대 위에 걸렸다고 한다.
그가 그린 여러 그림이 각기의 의미가 있지만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보는 순간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오랜 기다림 끝에 봄을 맞이하고 하나 둘씩 햇살 속에서 속살이 드러나듯이 펼쳐지는 아몬드 꽃이 눈앞에서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배경의 푸른빛은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높은 하늘이나 푸르른 대양을 느낄 수
있도록 생동감 있게 표현된 배경은 무한한 희망과 드넓은 세계를 품은 것같이 뻗어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벅찬 감동과 더불어 아들 하경이가 생각났다. 하경이를 낳고 처음 본 순간의 감격이
이 그림을 보는 감동과 중첩됐다. 더군다나 고흐도 동생 테오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며
그린 그림이라니 더더욱 나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를 갖고 싶었지만, 임신은 잘 되지 않았다. 기다리는 마음만 간절했다.
하나만 키우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싶기도 했지만, 둘째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오년이 지난 어느 날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땐 세상을 다 갖은 기분이었다.
‘자식이 뭐길래 그리도 아이를 낳고 싶어 했던가’ 싶지만 둘째의 임신은 주변 모두에게 기쁨과 희망이었다.
열 달 후 아이를 낳고 여느 집안의 평범함처럼 일상을 살았다. 다섯 살 위인 누나와 노는 모습을 보면 천국에서 사는 것 같았다.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다. 숟가락을 흔들며 밥 달라고 조르는 모습, 샤워하고 난 후 수건을 두른 모습, 쌔근쌔근 잠잘 때의 숨소리, 하경아 하고 부르면 돌아보며 씩 웃어주는 모습 등이
내겐 완벽한 천사였다.
7살쯤엔 호빵맨이 되고 싶다고 보자기를 목에 메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흉내를 냈다. 초등학교 때는 장애인 친구를 돕는다고, 누나보다 먼저 학교엘 갔다. 중학교 때는 베이스 기타를 품에 안고 잤다.
부모를 떠나 기숙사에서 살던 고등학교 삼년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치열하게 아파했다.
아이는 따듯했다. 맑았다.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성실했고, 부모에겐 늘 신뢰를 보여줬다.
한번은 대안학교를 가겠다고 하여 40일 새벽기도를 잘 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초등학생인 아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40일 새벽기도회를 참석했다. 세 차례에 걸친 면접심사도 치렀다. 아이는 당당하게 합격을 했지만, 부모는 경제적 이유로 보내지 못했다. 아이는 많이 슬퍼했지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일 뿐이었다.
부모의 직업으로 인해 어릴 적엔 부담감과 의무감을 배워야 했다. 철이 들면서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과 현실의 부모에게 괴리감을 느끼고 괴로워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부모의 직업을 부담스러워하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사춘기도 혼자 삭혔다.
부모를 떠나 기숙사에 살 땐 어둡고 긴 터널을 혼자 걷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재수를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간호학과를 갔지만 아이는 겉 돌았다.
그가 간호학과에 간 이유는 그랬다.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다. 또한,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의료선교사가 되기를 바랬던 부모의 기도 때문이었다. 의대에 지원할만한 성적이 안 돼 간호학과를 갔다. 오랫동안 아이와 대화하며 내린 결정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힘들어했다.
사실은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다고 했다. 시를 쓰고 싶고, 노래하고 싶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랬다. 아이는 부모의 기대에 옭아매져 있었던 거다. 자녀를 독립체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로만 떠들어 댔지, 정작 내 아이를 독립적으로 존중하지 못했다. 내 꿈을 아이에게 투영했다.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기대했던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 어리석음은 다행히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 오래가지 않도록 아이는 용감하게 선언했다. 아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며 비집고 올라오는 녀석의 간절함을 찾았던 거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아이를 놓아주었다. 자퇴하고 편입시험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원하던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지난 가을 졸업전시회를 하고 봄에 졸업을 했다.
“예술가로서 남들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자신의 길을 찾았으니 묵묵히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아이가 맑게 웃었다. 그런 그가 자랑스럽고 고맙다.
아이는 캠퍼스와 물감이 아닌 필름과 수만 번의 셔터의 작동으로 사진 속에 세상을 담을 것이고, 사진을 속에 자신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예술의 길은 멀고 험해서 고흐만큼이나 고단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의 몫이다. 부모는 그저 뒤에서 그를 따듯한 눈으로 지켜보고 마음으로 응원할 뿐이다.
부모가 앞서갔다고 모든 길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큰 교만인가를 깨달았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아이 아버지도 목사다. 고흐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신앙과 가치관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고흐를 못 마땅해 했다. 자신의 귀를 자르도록 정신으로 쇠약했던 고흐의 불안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고흐 아버지처럼 똑같은 과오를 범할 뻔했다. 아이의 속내를 모르고 우리의 욕심만 부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용감한 아이 덕분에 묘수를 찾았다.
우리 세대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세상은 촉각으로 변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다음 세대는 120살을 살 수도 있단다. 그 긴 인생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삶을 즐기듯 살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아이는 이제 사회에 첫발을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면접을 보고 연수를 받는 등의 일반 회사와는 전혀 다른
시작이다. 조명등과 카메라 가방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밤을 새기도 하고 욕에 가까운 고성도 듣는 막노동에 가까운 패션 사진 촬영에 막내로 일한다. 이름도 없이 숫자로 불리는 스텝 1, 2, 3중에 3으로.
그러나 아이는 개의치 않는다. 자기는 오년 후의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단다.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라는 책에서 인문학자 장영란은 이렇게 말한다.
“씨앗이 절벽 위에 떨어진 천명을 받아들일 때 절벽은 더 이상
씨앗의 약점이 아니다.
절벽은 씨앗을 빛내 줄 배경이다.”
27년 동안 아이가 살아온 시간과 환경은 아이의 배경이다. 고뇌와 방황의 시간들이, 가난하고 메였던
환경들이 아이의 배경이었지만 그 배경을 통해 아이는 비상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그림은 신비한 빛의 푸른 배경이 나무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그 푸른빛 배경은 무한한 희망과 드넓은 세계를 품은 것같이 뻗어있다. 비록 아이의 배경은
부족했을지라도 그 결핍이 아이를 성장하고 성숙시켜 드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게 할 것이다.
너의 계절에, 너의 길을, 너의 보폭만큼 가라. 하경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