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걷는 걸까?
발끝을 살며시 눌러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는다. 차는 천천히 오르막에 오른다.
어릴 적 타보았던 88열차에 앉아 있는 묘한 기분이다. 내리막을 앞두고 멈춰 섰을 때의 공포감을
잠깐 느낀 후 내리막을 달린다. 이제부터는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차 스스로 내려가도록 한다.
그 순간 운전대는 잡고 있지만 나는 하늘을 나는 중이다. 행글라이더를 탄 기분이라고나 할까?
섬진강에 뿌려진 은빛 가루에 눈이 부시고 강물과 어우러진 지리산 자락은 알프스처럼 펼쳐진다.
“아! 멋져, 멋져!”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지리산 토요 걷기에 참여하기 위해 섬진강 대교를 건너는 중이다.
가방을 싸는 나를 보며 딸이 한마디 던졌다.
“또 지리산에 가? 걷는 게 뭐 재미있다고 매주 거기에 가?”
그러게 걷는 게 뭐 재미있다고, 산과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매주 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걸까?
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걷는 게 좋다. 그리고 걷는 길이 좋다. 계절마다 변하는 풍광은 덤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서 이루어진 284km의 길이다. 그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는 길엔
대나무 숲도 있고, 소나무 군락지도 있으며, 호젓한 오솔길도 있다. 물론 경운기나 자동차가 오갈 수 있는
포장도로도 있다. 그런 길을 때론 혼자, 때론 같이 걷다 보면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맑아진다.
왜 걷는 걸 좋아하는 걸까? 많이 걸었다고, 잘 걸었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도시락 싸고 물 싸서
고단함을 자처하며 이렇게 걷는 걸까?
작년 여름에 함께 걷던 분이 이런 농담을 했다.
“이런 무더위에는 군인들도 쉰다는데 우린 이 더위에 왜 이렇게 걷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소리에 우린 박장대소를 했다. 그 이후에도 난 계속 걸었다. 비가 올 때도 걸었고 바람 불어
추운 날에도 걸었다.
난 왜 걷는 걸까?
걷기를 시작한 건 순천에 내려온 후부터다. 서울살이는 너무 바쁜 날들이었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들을 키우고 요양원에 계신 엄마에게 매주 마다 찾아가는 일 등으로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나 순천에 온 후로는 그 모든 일이 하루아침에 단절됐다. 이곳에 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이들은 기숙사로 들어갔다. 돈 주고라도 사고 싶던 시간이 남아돌았다.
무료하게 남아도는 시간이 나를 미치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봉화산 둘레길을 걸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걷기는 지금의 지리산까지 걷게 됐다.
가파른 언덕과 고개를 넘으면 숨이 턱에 찼다. 굴억해 두었던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면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본다.
“왜 이렇게 내 삶은 숨이 찬가요?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
한참을 걷고, 발걸음이 느슨해지면 격해졌던 감정도 잦아들었다.
빽빽한 나무로 그늘이 드리워진 길을 걸을 때는 노래를 군가처럼 불렀다. 산짐승이라도 만날까봐
내 발소리조차 무서워 귀를 예민하게 세웠고, 두 눈은 커졌다. 갈림길이 나올 땐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길을 찾는다. 우습게 침을 튀겨볼 생각도 한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고 내가 목적하는 곳에
이르면 산행은 끝이다.
대략 오전 열 시쯤 걷기 시작하면 오후 다섯 시쯤이면 목적지에 다다른다. 한 14~5킬로 정도 걷나 보다.
택시를 불러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출발한 곳에 차가 있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가다 보면 새삼 놀란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나 많이 걸었어?’
오늘도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걷기를 예찬하는 글이 많다. 걷기만 잘 해도 병을 고친다고 하며 걷기의 이로움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걷는 이유는 단 하나다.
걷고 있는 이 길이 내 지난한 인생길이고 내 굽은 삶 같아서이다.
평탄한 길을 걸을 때는 하늘과 나무 등 주변을 감상하며 내 발끝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반면 험하고 높은 고갯길을 오를 때는 내 시선은 오로지 발끝에 머문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지는 않을까?’하며 긴장한다. 물론 좌우를 살필 수도 없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한숨 돌리고 뒤를 돌아보면 내 뒤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제야 발끝이 아닌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저기를 걸어오려 그렇게 애를 썼구나’ 싶다. 발끝 외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었지만 결국
뒤를 돌아보면 풍경이 되는 길이다.
우리네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삶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앞에 닥친 문제만 보인다. 주변도 보이지 않고
뒤를 돌아볼 여유는 더더욱 없다. 시간 지나 문제의 심각성이 옅어진 어느 날엔가 삶을 뒤돌아보면
그 굽이굽이 지나온 삶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있다. 그제야 숲이 보인다.
이정표를 못 보고 길을 잘못 들었다 싶을 때도 있다. 그땐 당황하며 여기저기 길을 찾아 헤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길은 맞닿아 있어 결국엔 제 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조금 돌았을 뿐이고 조금
늦어졌을 뿐, 결국 제 길로 가고 있던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조금은 돌아가고,
조금은 늦어져도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면 괜찮다. 조바심내지 말고 뒤 쳐질까 염려하지 말고 당당하게 가자.
돌아보면 어떤 길은 ‘어떻게 그 길을 걸었지’ 싶은 길도 있다. 혼자 힘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길이다.
그때마다 누군가가 함께 걸었으며, 기꺼이 손잡아주던 사람들이 있어 너끈히 걸을 수 있었던 게 분명하다.
구례 구간을 걸을 때다. 화엄사에서 오미 마을로 갈 때 날이 어둑해져서 혼자 걷기는 무서워 포기할까 싶을 때였다. 지나는 남자분이 있어서 동행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의 제의에 당황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우리는 이름도 묻지 않고 그저 함께 걸었다. 두 시간 정도. 그분 덕분에 그날 걷기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걷기가 더 힘들다. 미끄러질까 조심스럽고 무릎에 무리가 갈까봐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리막길을 피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내리막길 또한 천천히 가다 보면 모든 것을 다 이룬 듯한(통달) 통합의 시간을 맞이한다.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시간, 더 애쓰지 않아도 그동안 애쓴 것으로 충분한 길의 끝이 온다.
그때야 우리는 편안히 처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동안 걸었던 길들은 어느 하나 똑같은 길이 없었다. 굽이굽이 돌기도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적히 있어 줘서 산행의 묘미가 있었다. 오르막길이 힘들 때쯤이면 낙엽 덮인 오솔길이 이어져 걷기 쉬웠다.
내리막길을 걷다가 다시 만나는 오르막길은 새로운 긴장감을 선사한다. 그렇다. 꽃길만 걷는 인생길은
화려하고 안정적일지는 몰라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는 못한다. 무료하고 지루한
그날그날은 살아있으나 죽은 심장이다.
이제 겨우 육십 줄의 삶을 돌아보면 내 인생길도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과 일반이었던 것 같다.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허덕거릴 때도 있었고. 묵묵히 혼자 걸을 때처럼 외로울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들꽃이 핀 꽃길이기도 했고, 바람맞는 황량한 신작로이기도 했으며, 발바닥 아픈 자갈길이기도 했다.
자랑할 것 없는, 어디에 내놓을 만도 못한 인생길이지만 주어진 삶의 분량을 회피하지 않고 충실히 걸었다.
이제야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지혜도 생겼다.
이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오늘 걷는 구간은 20km다. 지리산 둘레길 구간 중 제일 험한 구간 중 하나란다.
‘그래 가보자. 그 험하다는 길이 내 살아온 길보다 더 험할지 어디 한번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