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빨강,분홍, 무지개빛 봄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겨우내 움츠렸던 나무들도
어린잎을 내며 봄을 지휘한다. 수억만 개의 등을 켜놓은 듯 만개한 벚꽃길을 지나는 나의 발걸음은
떨어진 꽃잎을 밟자니 미안해 조심스럽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마침내 꽃을 피웠는데 겨우 열흘 만에
눈발처럼 흩날리니 참으로 가엽고 안타깝다. 이 꽃잎 하나하나를 피워내기 위해 그 추위와 기다림의
시간을 얼마나 참고 견뎌냈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이 산책길 위에 서 있는 것이 축복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걸었던 이길
봄날엔 벚꽃의 찬란함으로 희망을 키웠고, 여름에는 푸르른 녹음으로 지친 영혼에 안식이 되어주었으며
가을의 단풍은 내려놓음의 진리를 가르쳤고 겨울의 황량함과 쓸쓸함으로 나를 성장시켰던 길이다.
그러나 이제 3개월 후면 이별해야 한다. 사람과도 이별하지만 길과 장소와 시간과도 이별한다.
6월 말이면 정년퇴직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설 때는 타지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사람보다
이 길에게 마음을 먼저 주었다. 이제 이 길은 나에게 가장 편한 장소가 되었다.
마음이 휘청거리고 절뚝이던 날도 이 길을 걸었으며 멀리 있는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 때도 말 못 할
설움에 눈물을 흘릴 때도 이길 위해 있었다.
언제 찾아와도 말없이 반겨주는 오랜 벗처럼 그저 묵묵히 길을 내주었다.
10년 동안 나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머리는 더 희어졌고 얼굴의 주름은 늘었으며 걷는 속도도 달라졌으리라. 그렇담 나의 인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분노와 절망과 서운함과 속상함과 미움과 화남의 감정들에서 감사와 평안으로 성숙해졌을까?
아니 이곳에서의 10년 만이 아닌 정년퇴직을 앞둔 이 시점에 나의 인생 60년은 어땠을까? 한 인간이 60년을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정년퇴직을 앞둔 지금 많은 생각들이 물밀 듯 다가왔다 사라진다.
나의 60년의 인생길은 어떤 계절이었을까? 꽃처럼 화사한 봄날이었을까? 뜨거운 햇살과 소나기 퍼붓는
여름이었을까? 청명한 하늘에 열매 익어가는 창쾌한 가을이었을까?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눈보라에 절망했던 겨울이었을까?
60년의 세월이면 60번의 사계절이 지났을 텐데 어디 60년의 인생을 한 계절에만 빗댈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굳이 따져본다면 나의 60년은 여름이었다. 그것도 한여름 뙤약볕.
늘 바빴고 진땀 났으며 쉬어가기보다는 달려가기에 숨찬 시간이었다. 물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행복했던 화장한 봄날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남편의 회사 퇴출로 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막막했던 IMF 세월도 있었다. 그 모든 계절을 끌어안고 두 배 세 배 땀 흘리며 달려가야 했던 여름이
지난 60년이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가을은 언제쯤 올까? 아마도 내 나이 70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늦을 수도 있겠지만.
가을은 맑고 쾌청하며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때쯤엔 내 삶에도 나름의
열매라는 게 있지 않을까?
무엇을 인생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까?
자녀들이 결혼하여 한 가정을 꾸리는 것?
안정적인 노후생활?
내 이름 석자 박힌 책 한권?
물론 그런 것들도 열매라 할 수 있다만 그것은 내면의 열매가 아닌 외면의 열매일 뿐이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열매는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정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맞이해 성실히 살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수만 번의 이혼 욕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품으며 함께 노후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의 열매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자녀들에게 부모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도 삶이
소중하며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부모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면 그 또한 소중한 열매라 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등의 업적을 통해 역사와 문화가 발전해온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감히 그들과 내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기에 비교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내 삶을 내 인생을 누구와 비교하랴.
나는 이 우주에 유일한 하나이며 그 자체로 가치 있고 독보적이다. 다만 하늘에, 나 자신에게,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다면 –물론 많은 흠이 있었다. -
내 삶은 그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
평균수명 120세 시대다. 앞으로 남은 나의 생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인생 후반전은 전반전과 다를 것이다. 60년의 인생 노하우가 빛을 발하고 농축된 성숙미가 오래된 와인처럼 더 맛있고 알찬 열매를 만들어 낼 것이다 믿는다. 정년퇴직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그 시작을 바람에 흩날리는 수억만 개의 꽃잎들이
응원해주는 것 같다. 그들의 응원을 한 몸으로 맞으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본다.
10년 후에 다시 이 길을 걸으며 그 다음의 10년을 꿈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