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여행

59번째 가을 -첫째날

by 노크

10월의 새벽공기는 청포도알 맛이다. 새벽 6시 고속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실었다. 4박 5일의 서울 여행이다. 자전거를 싣고 서울을 갈 때는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설렌다.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이다. 한강에서 마음껏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리라는 기대로 벌써 가슴이 뛴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남한강 자전거 종주 길을 완전 정복하리라는 계획으로 긴 여행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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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고속버스터니널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센트럴 터미널에서부터 한강 반포 나루로 여유 있게 나간다. 12년 전 한동안 이곳에 살면서 자주 왔다 갔다 한길이라 익숙하다. 반포나루 입구를 나서자마자 한 무리의 자전거 동호회가 쌩하고 지나간다. 그 모습을 모는 순간 정신이 바짝 든다.

‘아 여기가 서울이지?’

순천이나 섬진강에서 자전거를 탈 때는 라이더들을 드문드문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한강은 평일에도 라이더들이 많아 덩달아 신이 난다. 오늘 같은 공휴일엔 무슨 대회라도 하듯 많은 라이더가 삼삼오오 때로는 둘 셋이 때로는 나처럼 혼자서 달린다. 그들을 보면 함께 달리는 것 같아 나도 신이 나고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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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언제나 생동감있다


아직 아침 10시인데도 공휴일의 한강은 각각의 모양으로 즐기러 나온 인파로 바쁘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그리고 여러 동호회들이. 그들 가운데 달리는 나도 하늘을 나는 풍선처럼 즐겁다. 그러고 보면 한강은 여러 기적을 일으키는 장소다. 오늘처럼 햇살이 눈 부시고 바람이 청아한 10월의 한강은 무엇을 해도 좋은 날이다.


유유히 페달을 밟고 잠수교를 지나 아들 집이 있는 망원동으로 간다·저만치 63빌딩과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최고층 건물로서 한때는 서울을 대표하는 건물이었다. 많은 사람이 63빌딩을 구경하러 갔으나 난 아직도 이렇게 멀리서만 바라본다. 한강을 중심으로 늘어선 높은 건물들은 볼 때마다 경제성장의 자부심과 동시에 저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마음이 겹친다. 얼마를 달렸을까? 지난 봄에 찾아갔던 절두산이 보인다. 서양 귀신 야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목을 잘라 강 건너에서 보이도록 시체를 걸어두었다는 절두산. 이름만큼이나 두렵고 무서운 산이다. 이제는 선교묘역으로 선교박물관으로 그 영혼들을 기리고 있으며 신앙의 본을 닮아가고 있는 순교성지다.


KakaoTalk_20241103_103744864_09.jpg 아래에서 내려다본 절두산 성지


아들은 이 망원동에 남편은 구리에서 나는 순천에서 산지 이제 한 달 조금 지났다. 한 달여 만에 만나 내일인 나의 생일을 미리 축하하는 의미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들이 추천한 갈빗집에 가서 점심부터 갈비를 뜯었다. 메뉴가 갈비인 까닭은 아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 생일인데도 아들이 좋아하는 갈비를 선택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늘 그런 삶이었다. 그게 싫지 않았고, 나도 갈비를 좋아하고. 다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먹었다 싶었을 때 비로소 고기에 손이 갔다. 남편과 아이들은 그걸 불편해했지만, 엄마인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내 생일이라 마음껏 먹어보리라.


갈비는 3대를 이어올 만큼 독특한 맛이었고 아들이 사줘서 더 맛있었다. 행복했다. 한 달 동안 많이 외로웠나 보다. 식사 후엔 망원동의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외로웠던 원룸 한 달 살이를 쏟아 놓았다. 그래도 10달 중에서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위로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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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의 카페는 소담스럽다


직업상 공휴일이라도 오래 있을 수 없어 아쉽게도 남편은 교회로 갔다.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생일 축하는 아주 훌륭했다. 멀리 떨어져 살면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된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 만나는 일조차도.


나는 자전거를 더 타고 싶었다.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많고. 아들은 요즘 보드를 새롭게 배우는 중인데 한강공원으로 보드를 타러 간다고 했다. 서로를 위해 파이팅을 전하고 난 행주산성 쪽으로 달렸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이 행주산성은 임진왜란인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권율 장군과 군사들이 전투할 때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산성」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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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의미의 대첩문을 들어가면 성안에는 권율 장군의 동상과 행주 산성비 그 외에 궁 연습 도장이 있는 충훈정 등이 있다.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부여나성과 비슷하게 이 행주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주변과 저 멀리 고양시까지 훤히 보이는 풍광이 가슴속까지 뻥 뚫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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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은 이제 청사초롱을 밝히며 「행주가 예술이야」라는 제목으로 야간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 모쪼록 이 행사로 이 행주산성의 의미와 가치가 어린이들과 시민들 가슴에 되새겨지기를 바란다.


행주산성을 내려와 자전거 쉼터에서 간식을 먹었다. 견과류 한봉지, 군고구마 작은 거 하나 그리고 통통한 샷인 머스킷 몇 알. 푸른 물빛 하늘 아래 온몸을 스쳐 가는 바람을 맞으며 먹는 간식은 여느 카페의 디저트에 비교할 수 없는 달달함이다. 바람과 하늘빛이 간식 맛에 뭔가를 첨가해줬나 싶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몸은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볍고 페달을 밟는 발엔 힘이 가해진다. 지구 끝까지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상쾌함. 이 청명함. 이 행복함.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


다음 목적지는 하늘공원이다. 이맘때면 억세로 장관을 이루는 하늘공원에서 지는 놀을 바라보리라는 생각으로 서둘러 페달을 밟는다. 깜빡 시간을 놓치면 노을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으로 이사 가기 전에 남편과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왔었다. 아마 이맘때였으리라. 그때도 억새가 바람에 춤을 췄고 하늘공원 오르는 길목에 청사초롱이 늘어져 있었다.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꽁꽁 싸매두고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한강공원에서 하늘공원 가는 길을 잃어버려 몇 번을 헤맸다.

‘아 어쩐다’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한다. 서둘러야 한다. 표지판에 하늘공원을 발견하고 입구를 찾아 자전거를 주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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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전에 왔었던 입구와 좀 다른 것 같은데’했지만, 상황을 살필 여가가 없다. 노을이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길은 계단이 400개가 넘게 있다. 성큼 성큼 계단을 올라갔지만 100개 200개 아 아직도 200개나 남았다. 주변엔 점점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뒤를 졸아보니 저만큼 한강을 넘어 건물 뒤편으로 해가 지고 있다. 구름 사이로 붉은빛이 스며들고 있다. 온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면서 찬란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저무는 저 빛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 하루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나.온화한 가을 햇빛이 오늘 하루 여러 곳에서 즐기는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스며들어 세월이 지난 어느날에 오늘을 아름답게 기억하리라.


400개의 계단을 올라 하늘공원에 이르니 내 키만 한 억새가 초저녁 바람에 하늘하늘하며 숨이 턱에 찬 나를 반긴다. 한강이 보이는 이곳저곳에서 아직 남은 노을의 여운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손길이 바쁘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꼬리에 꼬리를 문 여가 길에서 돌아오는 자동차의 라이트들이 하나둘 켜진다. 말간 하늘에 초승달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이다. 카메라에 담긴 노을 속에 이 평안도 잔잔히 담기기를 바란다.

한강공원은 어둠 속에서도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자전거를 돌린 순간 불과 50m도 안 떨어진 곳에 15면 전에 올랐던 하늘공원 입구가 있다. 아뿔싸. 코앞에 두고 마음이 급해 몰랐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문에 400개의 계단을 급하게 올랐고, 덕분에 내 다리는 더욱 건강해졌을 것이며 내 인생의 실수담이 하나 더 늘어 이야기 부자가 됐다.


새벽 6시에 고속버스에 올라 그리운 가족을 만나 만찬을 누렸고, 행주산성과 하늘공원을 두루 돌며 아낌없이 시간을 사용해 즐거웠던 오늘의 여행은 단 1초도 버릴 게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유유히 흐느는 한강 물을 따라 나도 페달을 밟는다. 이제는 페달에 힘을 주기보다는 천천히 크게 돌린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도 나처럼 행복해 보인다.

낮의 한강은 모든 이의 한강이지만 밤이 내린 한강은 연인과 친구들이 함께하는 젊은이의 한강인듯싶다. 한강 망원지구 입구에는 가을밤의 공원을 즐기러 나오는 인파들로 인산 이내다. 돗자리와 치맥을 양손에 들고서 말이다. 저들의 젊음이 부럽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보드 재미있게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란다.


"잘됐다. 저녁같이 먹자. 뭐 먹을까?"

"엄마 엄마가 맛있게 잘하는 돼지고기볶음 먹고 싶어요".

그래?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말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다시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망원시장에 고기 사러 달려간다.

온몸에서 행복 도파민이 펑펑 쏟아진다.

내가 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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