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가족시대 외갓집 위상이 커져...외로운 외할머니 혼 달래며 제사밥올려
전라도 순천 승주군 쌍암읍에 선암사의 음암(응봉)스님이 1995년 11월에 열반하셨는데 큰마누라는 외롭게 1984년에 추석무렵에 돌아가셔서 선암사에서 화장하고 제사을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 음암스님제사와 함께 우리 외할머니 제사을 하나요?아니면 술집여자였던 둘째마누라와 제사을 함께 하나요
큰마누라는 최씨문중에 무남독녀로 외할아버지의 인물됨을 보고 전답과 함께시집을 보냈다고합니다.
외할아버지는 스님이지만 저희집을 찾을때도 막걸리 한사발을 드시곤 하셧습니다..
감히 여자인 제가 외할아버지 제사상에 술한잔 올리지 못하고 글을 씁니다..
현재는 핵가족시대이고 외가집의 위치도 중해졌습니다.
젊은 부부들이나 저희 세대에는 아들이 없고 딸만 낳은 세대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외갓집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저도 딸하나가 있고 딸은 외갓집이야기을 하면 기차타고 선암사에 가자고 합니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졋습니다.
아들딸 구분없이 자식하나 가진 세대들에게는 외갓집의 위상은 대단하다고 봅니다. 자식을 기르면서 부모들 공경하듯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손녀손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고 봅니다..
선암사의 주지스님이 나서서 이일을 해결해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저도 딸과 함께 증조외할아버지가 스님이고 선암사에서 제사을 지내니 함께 가자고 나설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저희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에 본처이고 첩의자식들도 잘 거느렷다고 이야기을 하고 싶습니다.제사상에 누구의밥이 올라가있습니까?
저는 UNV로 부탄을 나가기전에 아버지 환갑잔치을 하면서 큰고모가 돌아가셔서 둘째고모가 사시는 해남을 방문하고 이어서 이모님들이 사는 순천을 방문을 해서 아버지의 환갑잔치을 알리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더 늦기전에 밀양박씨에 우리들을 족보에 올려야한다고 했습니다.옛날에는 족보에 올리려면 쌀을 주었어야 햇는데 시기을 놓쳤다는 이야기을 들었습니다.
현대는 아이들의 교육을 중요시 합니다. 전인교육을 지나서 창의교육을 내세우지만 아직 우리세대에게 역사을 교육하기에 앞서 가계에 대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더구나 IMF이후에 이혼가정이늘어남에 따라 어머니의 영향과 시댁의 무관심으로 아버지의 조상보다는 어머니의 조상을 더 따릅니다. 애아빠는 홀어머니에게서 키워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돌보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아도 잘모르고 화을 내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제딸에게 저의 외할아버지 이야기까지 하며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려 노력하다보니 어머니의 원통함도 다시 마음에 새겨집니다.
더구나 저는 큰딸로서 어려서부터 제사음식을 하고 제사을 준비하다보니 조상에대한 생각도하게 되고 역사에 대한 생각도 하며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딸에게 부자는 아니어도 선암사라는 절에서 스님 한분이 열심히 사셨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그런데 선암사에 갈 계기가 마땅치 않습니다.저는 어머니의 배다른 동생들과 그 자식들을 잘 모릅니다.그러니 그들이 외할아버지 제사에 제가 생뚱맞게 참석하겟다고 하면 못오게 할 것입니다. 아니 초대도 안할 것입니다.
요새는 핵가족시대로자식을 많이 낳지 않아 딸만 낧은 집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제사날 외롭게 아들이나 딸들이 집에 혼자두고 저혼자 갈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저는 늙어서 효도도 받고 싶고 손자손녀들과 웃으며 살 고 싶고 한국청년해외봉사단후배와 국제연합봉사단을 다녀오신분들과 연분도 맺고 외국인근로자들, 유학생들을 위해서 봉사활동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저의 외할아버지가 선암사 스님으로 마을의 이장으로 열심히 사신 스님으로 부처의 도량을 펼쳐서 나도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싶습니다.
외할아버지 제사밥 옆에는 누구의 밥이 놓여 있습닉까? 술집여자인 장남은 왜 우리 외할아버지 제사가 있다고 대전에 전화 한번을 안하나요?외할머니의 재산을 얼마 받았다는 막내외삼촌은 왜 우리집에 전화한통이 없나요?
이대로 선암사에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했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저는 제딸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외할아버지 자랑을 해서 불교에 관심을 갖은 딸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들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세대는 어려서 여자들은 제사상에 절도 못했씁니다.제사음식준비을 다해도
남동생은 아무한일이 없어도 말끔히 차려입고 제사상에 머리을 수그리고 절을 올립니다.
승주군 홈페이지에 올리려고 보니 승주군이 순천과 합쳐졌더군요.
어머니는 1960년대 초반에 순전간호전문대을 나오셨습니다.어머니도 오래 못삽니다.
선암사에 보낸 이메일을 올립니다.
너무나 오래전 일을 이메일로 보내서 여쭤봐서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건강하실때 너무나 원통해 하셔서 ...
추석이 올 무렵이면 저의 외할머니 제사돈을 보내면서 너무나 원통해 하셨습니다.
딸이라서 멀리서 어머니을 모시지도 못하신다고...
결국에 외할머니는 첩이 낳은 아들과 살다가 돌아가시고
결혼할 때 가져온 논답은 여자형제들과 나누면서
집은 순천에서 빵집을 하던 첩의 막내아들인가가 가졋다는 이야기을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이학년
1984년 추석무렵에 외할머니가 위독하다고 해서
추석무렵에 기차을 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순천의 쌍암을 찾았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해 추석제사는
제가 음식을 준비해 여동생과 남동생이 지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동네 작은 슈퍼가게에서는 제사나물을 하면서는 파을 넣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1995년 11월에 열반하신 응암스님입니다.
둘째 마누라였던 첩의 자식들에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키가 작았던 것 같은데 저희 아버지 환갑잔치에 오셨었지요.
응앙스님 열반하시고 화장을 했습니까 아니면 묘을 만들었나요?
부부의 경우에는 묘을 합장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묘는 나란히 만들기도 하고요.
외할머니는 최씨 문중에 무남독녀 외동딸이였다고 합니다.
외할버지가 용모도 출중하시고 똑똑해서 외할머니와 결혼을 하고
논밭을 가지고 시집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외할머니가 27세에 응앙스님이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을 만나
첩으로 맞았다고합니다.
외할머니가 아들을 못낳았다고 해서 그랬다는데 정확히는 알수가 없습니다.
저희 외갓집에는 자주안오시고 첩의 집에 자주가고 그녀에게서 아들이 서넛이 있다는 이야기을 듣고
막내딸인가는 대학총장인가 대학교수의 며느리인가 되었다는 이야기을 들었습니다.
저희 큰이모님은 선암사에서 1986년 밥을 해주는 보살로도 있었구요.
외할아버지께서는 첩을 들였지만 저희 외할머니에 대해서 예의을 갖추었다고 하시네요.
저희어머니가 공부을 하고있으면 집안일을 안시키고 공부을 하라고 하셨구요.
하지만 한 가정에 두마누라가 왠일입니까?가정에 기강이 서지 않는것 아닌가요?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받고 그래야 후세대가 잘된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1995년에 선암사에서 열반하신 응암스님은 화장을 했나요?묘을 만들었나요?
큰 마누라가 최씨입니다.
작은 마누라는 머리을 흔들어서 흔들이라고 불리었다고합니다.
주지스님은 이일을 어찌 처리 하시겟씁니까?
요새는 제사을 같이 올린다고 합니다.
작은 마느라 접의 자식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첩의 자식이라는 이야기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95년 10월인가 11월에 월반하신 응암스님은 누구와 제사밥을 먹어야 하겟씁니까?
이제 저의 큰이모님도 나이가 들고
저희 어머님도 거등이 불편하십니다.
아직 막내이모님은 쌍암에 살고 계십니다.
큰마누라의 자식들은 별로 잘되지을 못햇습니다.'
그러나 큰마누라의 제산은 첩의 자식들이 가져갔다고합니다.
한동안 외할머니가 살던 집을 가족들이 공동 소유로 별장처럼 쓴다는 이야기을 했었는데
저도 서울로 상경하고
한국청년해외봉사단으로 방글라데시을 다녀오고
]다시 UNV로 부탄을 다녀오면서 외갓집일에는 무신경해졌습니다.
어머니가 간혹 살아서 복도 없는 사람은 죽어서도 복이 없나보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추석에 가시냐고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선암사 주지스님은 이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
응앙스님의 제사 절밥 옆에 외로운 큰 마누라 최씨의 제사밥을 놓겟습니까?
머리가 흔들리는 술집여자인 첩의 제사밥을 올리겠습니까?
술집여자인 첩에게는 아들들이 있고 그의 자손들은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들어가기도 했다는데요
저는 글을 쓰기도 하는데 선암사에 대해서 좋게 글을 썻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 계단에 벽에는 선암사의 승선교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기독교 학교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해남에 대흥사는 안가보았어도 어려서 어머니을 따라 선암사는 여러번 갔었고
대학 다니던시절에도 선암사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 법명이 음암인지 응봉인지 기억이 희미하기도 합니다.
속세에서는 김씨였습니다. 재무스님으로 일하기도하셨다는데...
어머니는 제가 중학교때인가 스킬로 분홍색 매화작품을 완성해서 액자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커서 자료을 보니 선암사에 600년된 매화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순천간호전문대학교을 나와 구례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대전에서 조산원을 하시도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 함자는 김정자입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절에 법당에 나가 불교공부도 했지요.
선암사의 건너 산에 조계사가 있고 법정스님의 무소유책을 애독하기도했습니다.
한번은 법정스님이 계시다는 조계사도 가고 선암사도 가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어릴적에 선암사에 가서 보니 조용한 가운데 산사의 개울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