移徙 :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김(동아새국어사전). 이 간결한 단어에 얽힌 나의 젊은 시절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42년 결혼생활 동안 직장은 세 곳이었는데 삶의 터는 12번 옮겨 다녔으니 많이도 다녔다. 때로는 일 때문에, 때로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위로 형님 네 명은 결혼 전에 집을 장만하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집 마련은 꿈같은 일인데 서울에 주택을 가지고 결혼한 형님도 둘이니 참 대단한 일이었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 대구 근교에 소형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꿈에 부풀어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여기 저기 소개로 신부감 선을 보았다. 총각이 혼자 벌어서 집을 샀다는 게 후한 점수를 받아서인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을 아내로 맞았다. 결혼을 하고 새 아파트에서 신혼의 단 꿈은 당시의 관습이 그렇게 허락하지 않았다. 별스레 완고하지 않은 부모님이었지만 새색시가 시가의 풍습을 익힐 때까지 시집살이를 해야 한단다. 형수님들도 다들 몇 달을 지내셨으니 거역할 명분도 없었다. 혼수로 마련한 세간들을 마산의 부모님 댁에 들여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객지 생활에 지치어 새 아파트에 신부 들이고 알콩달콩 살려했는데 주말부부가 왠 말인가. 읍소와 응석으로 어머니를 설득하여 석 달 만에 허락을 받아내어 대구의 아파트로 살림을 내었으니 첫 번째 이사였다.
운이 좋았던지 3년 후에는 시내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OO맨션이란 이름이 붙었으니 평수도 넓고 교통 여건도 좋은 곳으로 갈아 탄 것이다. 지금이야 천지개벽이 되어 범어동이 대구 최고의 주거지이지만 그 땐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배부르고 잠자리 편하니 엉뚱한 탈이 났다. 아이 둘 낳고 오순도순 재미 붙을 때인데 툭하면 말다툼이다. 권태기라며 지나치기엔 다툼 횟수가 잦아진다. 승강이가 벌어지면 나중에는 부모님까지 들먹이고 네 집 내 집 따지다 보니 점점 치졸해지고 결국엔 열흘이나 보름씩 말도 섞지 않게 된다. 둘이서 그 까닭을 헤아려보니 형제부모도 친구도 없는 타향이라 서로만 쳐다봐야하고 사소한 갈등도 하소연 할 데가 없으니 골이 깊어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해결책도 찾았다. 처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가서 살자. 곁에 누가 있으면 싸움을 뜯어 말리겠지. 젊었으니 직장은 부산에서 다시 구하기로하자. 지금보다 못하기야 하겠나.
결심 했으니 덜컥 아파트부터 팔았다. 당장 직장을 그만둘 처지는 아니라 부산에 새 직장 구할 때 까지만 살자며 인근 만촌동의 주택 2층으로 세를 들었다. 5년을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으로 이사하니 육아 등 생활에 불편이 많았다. 난방이 시원찮아 큰방은 비워두고 작은방에 몰아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도둑 사건이 터졌다. 잠결에 조심조심 마루를 딛는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깼다. “누구냐!” 하고 외치니 후다닥 뛰어 달아난다. 손에 집히는 데로 작대기를 들고 달려 나갔으나 바깥은 깜깜하다. 살펴보니 큰방 장롱에 있던 결혼 패물 등 금붙이를 몽땅 털렸다. 이사 후 몇 달은 도둑 조심하라는 어른들 말씀이 꼭 맞았다. 무섭고 허탈하여 그 집에 석 달도 못 살고 급히 아파트를 전세로 구하여 옮겼다.
드디어 부산에 직장이 구해져 이사하게 되었다. 근무처가 있는 서면 중심가에서 도보로 출퇴근 가능한 곳의 아파트를 전세로 구하였다. 몇 달을 살았을까. 험상궂은 사내가 찾아 왔다. 자기 집인데 어찌 된 건거냐고당신들 누구냐고 야단이다. 설명을 듣고는 도망간 제 여편네 찾아내란다. 집주인이 여자인 것을 확인하고 계약을 했는데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남의 가정사를 다 알 수 없지만 짐작은 갔었다. 사내는 수시로 술을 마시고 찾아와서 행패다. 아내는 늘 불안해했다. 우리에게 세를 놓고 사내를 피해서 떠난 여자는 연락도 닿지 않는다. 그런 중에 다니는 회사도 여의치 않았다. 88년 올림픽이 끝나고 겨울이 다가올 즈음 마산의 친구로부터 새로운 직장 소개를 받았다. 대기업 협력사이고 한일합작회사라 신뢰가 갔기에 전직을 결정했다. 당장은 전세금을 못 돌려받으니 이사는 미루고 우선 부모님 댁에서 기거하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겨우 주인과 연락이 닿아 보증금 돌려받고 마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전세를 전전하던 몇 해 동안에 부동산 시세가 엄청 올랐다. 88올림픽 전후로 거의 세배가 오른 듯하다. 마산의 오래된 아파트인데 불과 일 년 전이면 사고도 남을 돈으로 전세도 겨우 구하였다. 결혼 때 첫 집만 빼고 6번째이사까지 계속 전세살이다. 꼭 다시 집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즈음에는 창원이 마산보다 집값이 많이 쌌기에 창원으로 눈을 돌려 아파트를 알아보았다. 1년 후에 용지동의 아파트를 마산의 전세금 정도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일곱 번째 이사에 생애 두 번째로 산 집인데 창원시청 근처이고 용지호수공원을 끼고 있어서 입지가 참 좋았다. 그러나 실망하는데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주공아파트는 건축비를 줄인 탓인지 보온이 허술하여 외풍이 심해 엄청 추웠다. 잘 때는 담요로 커텐을 덧대고 옷을 껴입고 두터운 솜이불로 견디었다.아이들 목욕시킬 때는 욕실에 석유 난로를 들여 놓는 불편을 겪어야했다.
그 무렵 인근에 H건설의 고층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했다. 승강기가 있는 15층 건물이다. 오가며 꼭 저기로 옮겨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3년 뒤에 기회가 왔다. 재개발 붐이 일며 우리 아파트 가격이 상승할 때 잽싸게 팔고 꿈에도 그리던 H아파트를 매수하였다. 1992년 결혼 12년차, 이사 9번째 만에 제대로 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그 후에도 10년 주기로 새 아파트로 옮기며 평수도 늘렸다. 당연히 자산 가치도 불었다. 열두 번째 이사한 용인의 아파트는 정원이 참 아름답다. 14년 된 고축이지만 내부 수리를 말끔히 하여 새집 못지않다. 아내는 더 욕심내지 말고 여기서 여생을 보내잔다. 그래, 그러자! 하지만 10년 후쯤엔 청소가 어렵다는 핑계로 좁은 집으로 옮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