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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없는 날에

by 운해 박호진

눈을 뜨니 6시 20분이다. 리모컨을 눌러 TV 여행 프로를 틀어놓는다. 혼자이니 편했는지 TV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깜박 다시 잠이 들었다가 일기예보 할 즈음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뭘 먹을까. 달걀프라이 만들고 토마토주스 한잔, 복숭아 하나, 버섯 수프, 견과를 넣은 요구르트, 우유 한 잔... 식단이 풍성하다.

설거지하고 세수하고 노트북 열어서 자료 정리하고, 하루의 시작은 변함없다. 복지관 수업 다녀와 집에 들어서니 썰렁하다. 사흘째 혼자인데 오늘은 더 서먹하다. 아내는 언니와 동생 등 4자매가 올케와 어울려 휴양림에서 지내며 주말에 올참이다. 아내가 떠나는 날은 수서역에서 부산서오는 손님 맞아서 포천의 휴양림에 태워다 준다고 바빴고 어제는 종일 컴퓨터 앞에서 밀린 자료 정리하고 휴대전화기의 사진 내려받으며 시간 보내었다. 예전에도 이럴 때가 간혹 있었지만, 용인으로 이사 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 보내었는데 여기선 그럴 수도 없다. 아는 이는 더러 있지만, 갑작스레 전화해서 만나자 할 만큼 막역한 사이가 아니다.

문득 아내가 내 험담 끝에 하던 악담이 생각난다. “나 죽고 나서 혼자 오래오래 살면서 마누라 귀한 줄 알아라.”라고 하던 말. 기대수명이 남자 80.5세이고 여자 86.5세(2020년 기준)이니 확률적으로 내가 더 살 일은 없다. 최근 행정안전부 자료를 보니 90세 이상 생존자가 30만 명을 넘고 80세~89세도 203만 명이다. 우린 양쪽 부모님 중에 아흔을 넘겨 사신 분들이 있었으니 은근히 욕심이 생긴다. 기대수명으로 보면 아내가 내 사후에 10년 가까이 생존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그 반대의 경우가 된다고 가정하자. 나 혼자 살아갈 수가 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배곯아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십여 년 전 아내가 투병할 때 밥해 먹고 빨래하며 살아본 경험이 있다. 밥은 당연하고 된장찌개, 계란찜, 콩나물국 등 간단한 반찬도 만들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은 밀키트가 잘 나와서 어떤 요리도 가능하다. 청소, 공과금납부, 분리수거, 음식물쓰레기 처리는 예전부터 내 담당이니 가사는 걱정 없다. 문제는 아들딸 며느리와의 소통이다. 전화가 걸려오면 왜 그리도 할 말이 없는지 두어 마디하고 아내를 바꾸고 만다. 성격이 바뀔 리가 없으니 점점 외톨이가 될 것이다. 바깥나들이도 줄어들고 남과의 교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내 없이 사흘도 외로운데 혼자 살아간다니 상상도 할 수 없다. 안되지, 절대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내가 나보다는 오래 살게 해야 해.

예전에 나중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내 : 여보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할래?

나 : 내가 집에서 병구완해야지. 당신을 절대로 요양병원에는 안 보내.

아내 :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나 : 장례 치르고 당신 따라가야지.

아내 : 설마! 그럴 리가. 얼씨구나, 하고 혼자 잘 살겠지.


또 내가 먼저 아프면 망설임 없이 스스로 요양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가 병구완하신 생각이 난다. 육중한 체구의 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리어 닦아주고 대소변 가려내며 큰 고생을 하셨다. 내 체중의 절반밖에 안 되는 아내에게 그런 고생을 안길 수는 없다. 설령 아내가 인지 능력이 없어져도 이 약속만큼은 꼭 지킬 참이다. 그래야 내가 지은 죄 일부라도 갚지.

사람 목숨은 마음대로 안 되고 가는 순서가 없다 한다. 유달리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은 나는 이런저런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은 아내와 비교된다. 과체중이지만 지방보다는 근육이 많고 우리 또래가 흔히들 먹는 대사증후군에 대한 약은 전혀 먹지 않으며 치과 치료마저 받아본 적이 없다. 웬만한 몸살감기는 첩약 하루분이면 끝난다. 반면에 아내는 열심히 운동하지만, 순환기 관련한 몇 가지 악을 복용하고 있다. 종일 가사노동에 시달리면서 불면증도 있다. 저녁마다 발과 종아리를 마사지해 주어 잠들게 하는데 허약한 팔다리를 주무르다 보면 안쓰럽다. 이 나약한 몸으로 43년을 버티어 내었으니 정말 강하고 대단하다. 내가 더 일찍이 당신을 도왔어야 하는데.

그나저나 자매들 모여서 헤헤 호호 얼마나 신나는지 전화도 없다. 심심하여 전화하니 지금 피박을 쓰게 되었다고 빨리 끊으란다. 어휴~ 모처럼 모여서 고스톱이라니. 아내가 없는 틈에 억지로라도 편해야 하건만 그게 잘 안 된다. 모레는 다들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뭘 할까. 빨래도 개고 이것저것 정리한다. 깨끗하게 청소나 해두고 기다려보자. 현관 바닥까지 걸레로 훔쳤다.

여보, 즐겁게 놀고 돈도 많이 따와. 앞으로는 혼자서라도 처가에 원정도 다녀오고. 그리고 우리 아프지 말고 같이 오래오래 살자. 아니, 당신이 더 오래 살아. 난 심심해서 혼자서는 못 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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