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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밟으며

by 운해 박호진

사각 사각 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참 좋다. 단풍 흐드러진 가을보다는 초겨울에 바싹 말라 있어 밟는 촉감도 소리도 더 좋다. 참나무인지 상수리인지 떡갈나무인지 분간은 못 하지만 주춤주춤 서서 앙상한 가지만 덩그러니 남아 하늘 향해 벌서고 있다. 메마른 낙엽은 정갈한 갈색으로 언덕바지에 소록소록 쌓여있다. 오솔길에 쌓인 낙엽은 온몸으로 체중을 받아 으스러지며 마지막 노래를 한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면 부스러지고 흩어지고 회색으로 변하지만 이내 바람이 오롯이 다시 모아서 낙엽 융단을 만든다.


법화산(法華山). 지난봄에 지인이 추천한 곳이다. 법화경(妙法蓮華經)에서 그 이름을 따왔고 그곳에 경찰대학과 법무연수원이 세워져 오묘하다는 설명과 곁들여. 월요일은 파크골프장이 휴무이다. 신갈천을 걸을까 하다가 법화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가까이 있는 석성산(471.5m)은 동백에서 오를라치면 산세가 험하고 광교산(582m)은 4시간 넘게 걸려 늘 망설여진다. 법화산을 검색하니 구성동 행정복지센터에 주차하고 길 건너서 오르며 2시간 남짓 걸려 다녀올 수 있단다. 기대감으로 출발. 산길은 호젓하니 좋았다. 간혹 계단길이 있으나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여 노인들 걷기에 딱 좋다. 쉼터도 잘 갖추어져 있고 곳곳의 이정표가 안내를 잘해준다.

정상에 오르니 넓은 데크가 있고 정상석에 383.2M라고 새겨져 있다. 멀리 석성산과 광교산이 건너다보인다. 오르길 잘했다 싶다. 찻길로 다닐 때는 아파트 숲뿐이더니 이렇게 넓은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니. 그 품마다 아파트가 키를 자랑하며 줄지어 서 있다.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100년도 못 채우면서 생로병사를 걱정하고 명예와 부에 집착하고 잘나고 못난 탓하며 서로 다투고. 떠나면 낙엽처럼 온갖 영욕(榮辱)이 한 줌 흙인걸. 88세까지 팔팔하게! 내심 다져온 욕심의 나이도 80%를 넘어섰다. 발가벗고 서 있는 저 나무들은 새봄이면 다시 움트지만, 육신은 그 그늘의 흙이 되겠지. 봄과 여름, 가을을 추억하며 차디찬 겨울을 마중한다.


이내 어둑해지고 을씨년스러워진다. 불나방처럼 불빛을 쫓아서 하산 걸음이 빨라진다. 사각사각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는 여전하다. 문득 프랑스 시인 구르몽의 시 ‘낙엽’의 후렴구가 떠오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내가 외우는 단 한 줄이다. 미지의 여인 시몬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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