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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Feb 07. 2024

평생 재미있을 사람

결혼은 당황할 틈도 없이 날아들었다.

여자는 얼마나 완강했을까? 


결혼은 절대 안 한다며, 한 번만 '우리 나중에'라는 말을 꺼내면 정말로 헤어질 수도 있다고 남자의 마음에 대못을 받았다. 신개념 가스라이팅인가? 아니면 마음 착한 남자의 배려였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대체 서로에게 무엇이 매력이었는지 코로나라는 대 역병의 시대에 매주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둘은 추억을 키웠다.


추억. 

딱 그 정도였다.


우정이라기엔 섹슈얼한, 사랑이라기엔 가벼운 그런 관계.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들만 가득했다. 어찌 됐든 확실한 건 그 이야기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남자에겐 온통 여행이었고 여자에겐 온통 흥미로운 사건사고집이었다. 특히나 남자는 과묵했고 여자는 시끄러웠는데 그 덕분에 점점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다. 여자는 여전히 요란하지만 남자는 이제 반대편 귀를 내어주고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굽는다. 여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253개에 더해 255가지의 취미를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시간은 점점 알록달록해졌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업이 와르르 망해 카페에서 알바나 하고 있는 여자, 그리고 20대 중반의 사회초년생은 장거리 연애를 함에 따라 점점 개털이 되어갔다. 그렇게 가난한 두 사람은 남들 다 일하는 어느 쌀쌀한 3월에, 그것도 평일을 껴서 캠핑을 가게 되었다. 솔직한 이유는 흐린 눈 해주면 감사하겠다. 표면적으로는 관광지에서 일하는 바리스타가 성수기 주말에 쉬기란 어렵다는 고상하고 멋진,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있다. 아무튼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첫 휴가였다. 

캠핑은 딱 우리 같았다. 고요하지만 시끄러운, 우리만의 세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사람은 너와 나뿐인 그런 낭만적인 하루. 잔잔한 호수를 눈에 담으며 신나는 록 음악에 맞춰 춤추는 시간들이 좋았다. 정말 멋진 휴가였다.


부스스한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로 설거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너랑 결혼하면, 평생 오늘처럼 재미있을까? ”


뱉어버렸다. 충동적인 마음이 말릴 틈도 없이 튀어나왔다. 이러면 안 됐는데. 나는 아직 20대였고 상대는 두 살이나 어렸다. 


결정적으로 나는 민망사*하고 싶진 않았다. 


불과 1년 전, 상대의 어머님께 우연히 인사하게 된 날 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당신의 아이는 아직 많이 어리고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미래를 그리는 대화는 어렵다고 당돌하게도 떠들어댔다. 그런 내가 하는 프러포즈라니. 와중에 이 귀여운 남자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당연하단다.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는 스스로 빠르게 노선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 지금은 말고. 한 1, 2년쯤 뒤에? 그때에도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한 번 프러포즈해봐 봐! ”


아버님도 아빠도 그때까진 회사에 다니겠지. 아빠가 결혼할 거면 현직에 있을 때에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으니까. 그렇게 생전 느껴보지 못한 포근한 마음을 안고 본가로 돌아왔다. 


그런데 글쎄 아빠가 이번 연말에 명예퇴직을 한단다.


아빠의 계획은 완벽했다. 연말에 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갖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 그리고 퇴직연금과 실업급여를 받으며 2년 정도 백수 라이프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 이후엔 회사의 시니어 재취업 프로그램으로  용돈 벌이를 하거나 당구장을 차려 멋진 아지트를 만드는 것도 위시 리스트에 있었다. 30년이 다 되도록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서른의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와 내 동생도 다 컸다. 하나는 결혼 생각이 없어 보이고 하나는 아직 결혼을 말하기엔 어리니 더할 나위 없는 타이밍이다. 아빠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 순간만을 상상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 아직 안 돼! 나 결혼할 것 같아. “


급발진 한 번에 아빠의 퇴사는 이렇게 또 물 건너갔고 내 결혼도 갑자기 빠르게 날아들었다.


민망해서 죽는 것. 귀가 빨개지고 얼굴이 터질 것만 같이 체온이 올랐을 때 가끔 죽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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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퇴사의지와 나의 결혼의지 중 무엇이 이겼냐고 물으신다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딸바보 아빠는 나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용돈을 올려달라고 하던 11살 꼬맹이 시절의 딸은 아이스크림의 물가상승에 대해 논하며 용돈 인상 제안서를 가져왔었는데. 이번에도 반박할 수 없는 이유들로 오랜 열망을 막았다. 그래도 드디어 이 집안에도 아빠의 입장에 공감해 줄 남자사람이 들어온다니 완전한 손해는 아니었겠지. 

결혼하고자 하는 딸과 퇴사하고자 하는 아빠의 열띤 토론은 다음 화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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