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딩크를 곁들인.
20대 초중반을 함께 한, 혹시나 이렇게 계속 만나다 보면 결혼이라는 게 우연히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22살에 만나게 된 그 사람은 무뚝뚝했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평범한 어린아이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사랑은 소설처럼 뜨겁진 않았지만 서로가 감정적으로 원하는 걸 주고받으면서 꽤 오래 잘 만난다고, 이 정도면 우린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던 사랑이었다. 내 남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때의 나는 사랑을 지켜내는 데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딱 5년의 인연이었으니 그의 이름은 제쳐두고 잠시 오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5년의 시간 속에서 그와 내가 이룬 것들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했고, 취업을 했고, 새로운 사회생활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아버지의 차를 물려받아 운전을 하게 되었고 직업과 자동차가 생긴 뒤로 데이트도 제법 윤택해졌다. 내 마음이 짜게 식어가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다.
그 때문일까?
어느 날부터 남자의 모든 말에는 "우리 나중에 같이 살면"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진심일 것이다. 그는 나에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서른 살엔 결혼을 하고 싶어 했고, 바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연애가 길었으니까 그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았다면 그저 완벽한 관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함께 한 긴 시간 동안 모든 차이들을 맞춰놓은 관계, 서로에게 이 순간 무엇이 필요한지 한 번에 정답을 말할 수 있는 관계... 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정말 사랑했다고 해서 결혼이 주는 거대한 단점들을 다 이겨낼 각오가 서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 삶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했다. 게다가 나는 비혼주의, 딩크, 여성혐오의 개념조차 없던 사춘기 때부터 결혼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떡잎부터 글러먹은 아이였다.
장녀의 삶은 어떠한가. 아빠나 할머니가 힘들게 할 때면 엄마는 나를 붙잡고 고민상담인지 감정 배설인지 모를 것들을 시도했다. '너네 아빠는 왜 그런다니?'라던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려워' 하는 말들이었는데 당연히 이해가 가는 사연들이라 엄마의 감정에 동화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엄마와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지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싹텄다. 우리 아빠는 분명 엄마를 사랑하는데 그래도 평생 함께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구나. 내가 백마 탄 왕자님이나, 나를 공주처럼 떠받들어주는 사람이나, 아니면 운명의 사랑을 만나서 결혼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동화의 끝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기에는 또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는데 적나라한 낙태 동영상이 학습 자료였다. 정말 아파 보였다. 아이를 낳는 고통과 지우는 고통이 같다고 하는데 그럼 둘 다 너무 아프겠지? 나는 아픈 게 싫었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책임감 없이 낳아져 버려지는 고아가 엄청 많지 않은가. 먼저 그런 친구들을 사회의 책임으로 입양해 잘 키워내는 것이 아이를 위한 일 같았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예쁘게 보이지도 않았다. 어린이는 그 자체로 천사라던데. 나한텐 울음소리의 데시벨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냥 시끄러운 작은 사람일 뿐이었다. 내 자식은 예쁘게 보인다고? 지금 키우고 있는 도마뱀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도마뱀은 울거나 떼쓰지 않는다. 이 성교육의 목적은 '조심해라' 였겠지만 내가 배운 것은 출산의 고통 간접체험이었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무적의 논리가 된다.
나 아이는 안 가질 거야.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내가 아픈 게 좋아?
나는 내가 아픈 것도, 당신이 아픈 것도 정말 싫어.
결혼은 하기 싫을 것이라는 태도로 일관했는데도 오년이는 꾸준했다. 우리의 실질적 마지막 날까지도. 영등포의 어느 국밥 집. 그는 언제나 그랬듯 비슷한 말로 운을 뗐다.
"우리 같이 살면 내가 진짜 잘해줄 거야. 내 월급도 다 가져가."
"네 인생 로드맵을 한 번 말해봐. 언제 뭘 하고 싶고 언젠 뭐가 되고 싶은지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야"
"나는 31살 정도엔 아빠가 되고 싶어."
헉. 3년 남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가 그의 꿈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게다가 이거는 거의 프러포즈 아니야? 이런 얘기를, 아무리 내가 물어봤어도 그렇지, 술국이랑 소주를 적시다 반쯤 풀린 눈빛으로 하는 건 반칙이다. 그리고 나는 T발 C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에 찌들어 현실감각은 있는 사람이었다.
오년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결혼 안 할 거야. 우연히 결혼을 하게 되어도 아이는 정말 정말 싫어. 내가 내 핏줄이라고 예뻐할 자신도 없고 키워낼 자신도 없어. 네 꿈을 위해선 지금 쯤 내가 너와 헤어져 주는 게 맞을까? 그러면 1년 정도 그리워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 다음에 1년 정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허니문 베이비가 나와준다면, 오년이 네가 31살에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의 만취한 오년이는 아직 시간이 있고, 그 시간에 나를 설득해 볼 거라고 선언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도 모든 것을 감내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진 않았던 것 같고, 언젠가 일 하다가 짜장면이 불어서 속상해 투정 부리는 나를 달래줄 에너지는 오년이에게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 그렇게 긴 시간 함께 한 사람과의 마지막은 짜장면이 불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조져지는 건 나였다. 같이 찍은 사진을 지우다 보니 1.2기가바이트의 여유공간이 생겼다. 핸드폰의 속도가 빨라진 게 웃기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정리를 하면 할수록 이 자식과 보낸 내 20대의 전부가 억울했다. 이럴 거면 빨리 헤어질걸. 남자는 다 필요 없어. 영원히 혼자 살 거야. 강릉으로의 이사는 이런 상황에서의 도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나를 아무도 모르는 그 작은 고향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진짜 짝꿍도 만나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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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끝은 결혼 혹은 이별이다. 결혼이 싫다는 이유로 이전의 모든 사랑을 이별로 마무리한 나에게 있어서 내 동거인은 정말이지 신기한 사람이다. 본인은 결스라이팅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아 참, 결스라이팅은 우리끼리 사용하는 은어 같은 것인데 결혼+가스라이팅의 합성어이다. 결혼 싫어하는 나를 결혼으로 이끈 꿀팁! 뭐 이런 거겠지.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가스라이팅에 성공해 결혼에 골인하게 된 우리 집 동거인의 인터뷰를 준비해 오도록 하겠다!
... 일단은 결혼 준비에 지친 예비 신부의 투덜거림을 만나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