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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Feb 08. 2024

어느 캥거루의 외침:  아빠, 아직 퇴사하면 안 돼!

다소 속물적인, 제법 합리적인 결혼 준비의 시작

2004년,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에겐 심각했던 주제의 발표를 부모님 앞에서 한 적이 있다.


이름하여 “용돈 인상 PPT".


300원이던 스크류바가 무려 700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용돈은 작년에도 올해에도 여전히 한 달에 2만 원입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제 인생의 낙은 바로 학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건데, 700원 x30을 하면 2만 1천 원. 숨만 쉬어도 천 원이 모자랍니다. 게다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스크류바가 아니라 초코맛 빵빠레입니다. 용돈을 조금 올려주신다면 더 이상 숙제를 밀려서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논리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나름의 이유도 있고 당찬 의지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저 떼를 썼다. 같은 해에 방송부와 걸스카우트, 도서부를 한 번에 하겠다고 우겼다. 이미 학원 수업도 풀로 차 있었고, 어느 초등학생도 그 세 개를 동시에 하진 않는다. 아무래도 학교를 좋아하진 않으니까. 셋 중 하나만 들어가도 학교에 오래 메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담임 선생님께서 엄마에게 전화해 “방송부는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면접이 있으니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데 일단 신청하게 해 주시죠.”라고 했고 엄마는 결국 가정통신문에 서명을 해주셨다. 그 결과는?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그리고 ’방송 예술 대학교‘에서 방송을 전공하게 된다. 교수님 추천으로 취업까지 했었으니 족히 15년은 방송에 몸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웃음)


이뿐만이 아니다. 교복을 입으면 응당 흑화도 좀 하고 중이병이라는 극악무도한 병에 걸려줘야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멋보다는 실리를 택했나 보다. 동생과의 합작품으로 완성한 2007년의 어버이날 편지가 얼마나 가관이냐면 그리스 로마 신화, 마법 천자문, 메이플 스토리, 내일은 실험왕 전집*을 사달라고 요청했다. 그것도 A1 전지 사이즈를 가득 채워서.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몇 줄 안 된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다는 헛소리의 향연들. 그리고 그 대왕 편지를 밤중에 베란다 통창에 붙였다. 거의 대자보 수준이었다. 이 편지가 부모님 마음에 왜 여전히 소중한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만화책을 얻었고, 평생의 수치스러움도 덤으로 받았다. 저 편지지는 제작주문한 유리 액자에 여전히 보관되어 본가 벽에 붙어있다.




“안 돼, 나 결혼해야 해.”


데자뷔였다. 언제나 혼자 생각해서 자신만의 답을 가져왔던 당돌하고도 말 안 듣는 딸의 당황스러운 발언. 어른이 되고 나서는 좀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그저 부모의 허락이 필요 없어져서 말을 안 한 것뿐인 게 확실하다. 결혼은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에 얘가 또 이러는 거고.


언제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큰 딸이라서, 말의 무거움을 알고 있도록 키웠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오히려 결혼을 정말 안 할 줄 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기 싫다, 아빠 인생에 손주는 없다, 나를 평생 귀여워해라 하는 말들을 반복적으로 하기도 했고. 아빠 본인도 그저 예뻐서 ‘아빠랑 평생 살자’ 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한 건물에 1층엔 엄마아빠, 2층엔 큰 딸 내외, 3층엔 작은 딸 내외 이렇게 모여 살고 싶다’ 하는 실없는 농담을 했다. 아니 그런데 그건 농담이지! 딸아이가 커가면서는 결혼을 하긴 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도 있긴 있었다. 안 한다고 하니까 결혼해라 강요하진 않았지만.


노후준비도 완벽했다. 연말에 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갖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 그리고 퇴직연금과 실업급여를 받으며 2년 정도 백수 라이프를 즐기고 싶다. 그간 너무 치열했으니까. 그 이후엔 회사의 시니어 재취업 프로그램으로  용돈 벌이를 하거나 당구장을 차려 멋진 아지트를 만드는 건 어떨까? 이제 애들도 다 컸다. 하나는 결혼 생각이 없어 보이고 하나는 아직 결혼을 말하기엔 어리니 더할 나위 없는 타이밍이었다.


결혼은 생각 없다는 두 딸에게 축의금 나간 게 어마어마하니까 나중에라도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퇴직 전에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빠 몇 년 안 남았다고. 노후 준비도 해두었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길어봐야 2~3년이니까 큰 딸, 넌 알아서 잘 살고 작은 딸, 넌 어서 취직하라고. 나름의 경고였다. 그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둘째는 별안간 연애를 시작하지 않나 첫째는 갑자기 결혼을 하겠단다.


... 왜?

....... 혹시, 사고 쳤니? 음, 아니야? 그것 참 다행이구나.




아빠가 퇴직이라니.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철이 없어서 아빠는 계속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저녁엔 퇴근을 하며, 주말엔 조기축구에 나갈 줄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온전히 축하해 줄 것 같았는데 별안간 퇴직 이슈라니. 적잖이 놀랐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철은 못 들었지만 나름 잘 숨기며 사회생활을 이어왔다. 특히나 30년 동안 같은 회사를 다닌 아빠의 마음을 나는 전부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지루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회사와 직업을 바꿨고 지금도 이직을 앞두고 있는데 그는 온전히 가족을 위해 묵묵히 힘든 회사 생활을 견뎌온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결혼도 하긴 해야 한다. 아빠만큼이나 이 남자를 사랑하니까. 어느새 내 삶에 녹아있다면 적당한 사랑일 것이고, 이 사람과 매일매일이 즐겁고 웃음이 가득하다면 생각보다 더 뜨거운 사랑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갖고 싶은 건 가져야만 하는 성질. 내가 가진 최대 단점이기도 최대 장점이기도 했다. 기력이 없어서 PPT까진 준비할 수 없었지만 아빠가 퇴사 생각을 멈춰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고, 가족회의가 시작되었다.


“결혼 안 한다며.”

“그렇게 됐어.”

“언니가 결혼하면 나는 어떻게 해? 아빠 퇴직하고 내려가면 언니랑 살려고 했단 말이야”


알고 보니 내 비혼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부모님은 퇴직 후 본가를 정리하고 나와 동생이 살 보금자리를 전세로 알아봐 주려고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동생의 사정이다. 난 결혼하면 신혼집에서 살면 되니까. 결혼식 날짜를 잡아야 하는 나에게는 동생의 거처보단 아빠의 퇴사 시점이 더 중요했다.


“그건 네 사정이고. 아빠는 2년 뒤로 퇴사 미룰 수 없어?”


없었다. 이직을 많이 해본 내가 제일 잘 아는 부분이다. 퇴사를 결심한 마당에 회사에 가는 것, 매일매일이 월요일이나 다름없다. 월요병이 24시간 주기로 돌아온다. 그래도 딸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아빠의 마지막을 양보해 주었다. 양보해 주었나?


“그럼 아빠, 1년만 더 다니자. 나도 내 생각보다 1년 먼저 결혼할게.”

“아빠도 사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강아지마저도 여자인 이 집안에서 아빠 편이 생기는 거야!”

“돈은 걱정하지 말아. 일단 우리가 알아서 할부로 해보고 정 어려우면 부탁할게.“

“아빠가 결혼할 거면 퇴사하기 전에 하라며. 난 아빠말 잘 들으려고 하는 거야.”


“그래, 고오-맙다”

나의 결혼 선언은 우리 가족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를 행복으로 이끌었다. 나의 귀여운 남자는 본가에 갔다가 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가도 아빠와 단둘이 홍어 삼합에 막걸리를 마시고 소파에서 낮잠을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막내아들인 짝꿍은 내 동생을 자기 동생 대하듯 한다. 동생은 처음이라 신이 난단다. 나도 모르는 새에 동생과 호칭정리까지 끝냈다. 가끔 남편은 나도 모르는 아빠의 마음 근황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내 결혼은 그렇다 치고 동생을 위해서라도 퇴직을 1년 더 미뤄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 중이시라고 한다.


그들의 친화력에 되려 내가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

당시엔 이런 류의 학습만화 전집이 유행했었다. 보통은 한 친구의 집에 한 시리즈 정도가 신간 출시되고 있었는데 매번 놀러 가서 빌려보기가 정말 힘들었다. 특히 내일은 실험왕의 경우에는 만화책만 있는 게 아니라 실험 키트가 같이 들어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아무도 빌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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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비혼주의자의 결혼 설득이라니. 지금의 내가 생각해 봐도 인지부조화가 온다. 아마 독자 여러분들도 “아가리 비혼주의자 아니야?”하고 독설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인정하는 바, 다음 화에서는 내가 비혼주의였다는 증거를 제시하겠다. 남편에겐 비밀로 하고 싶은 연애사가 등장한다. 무려 5년, 청춘을 바친 전 애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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