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몰두
'몰두'(沒頭) :어떤 일에 온 정신을 다 기울여 열중함.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때때로 무언가에 몰두하는 순간을 겪게 된다.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자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만약 그것이 자의에 의한 '자발적' 몰두의 성격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순간을 통해 희열 아닌 희열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순간은 우리를 한층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격상시켜주는 황홀한 시간이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뭐에라도 '몰두'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나를 둘러싼 여러 환경적 제약들이 내가 다양한 분야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는 한다지만, 그래도 나는 내게 허용된 부분 안에서는 무언가에라도 몰두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 나오는 구절의 한 부분이다. 시인에게 있어 자신을 키운 생명의 원동력이 바람이었다면 근 사십 년을 가까이 살아온 내게 있어 나를 그동안 길러온 원동력의 대부분은 이 '몰두'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한 아이가 자라나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안타깝게도 난 그다지 교육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은 환경 속에서 꿋꿋이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야만 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 품격의 것을 논하기 전에,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한 인간을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절대적인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막연히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능력이 된다면 음악가가 되고 싶기도 하고, 화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난 태생부터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고, 타협적인 일에는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를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세상을 향한, 사회를 향한, 사람을 향한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술적으로 표현해 나가며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 세상을 견뎌나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나는 자연스럽게 세상으로부터 음악을, 미술을 하기 위해선 결코 나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부모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예술을 꿈꾼다는 건 그저 사치이고, 허황된 이상일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술을 향한 열망이라는 게 상황이 이렇다해서 쉽게 누그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난 어떻게든 부모의, 고가의 사교육의 도움 없이도 예술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맸고, 그 길 가운데 글쓰기를 만났다.
처음에는 내 삶에 대한, 내 존재에 대한 회의감, 환멸감 등에 대한 감정들을 그저 거침없이 토로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의 가장 친한 벗이 되어 있었고, 내 유일한 숨통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토해내고, 쏟아내던 그 공간에서 나는 어쩌면 이것이 예술에 가까운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몰두'라는 것과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내 존재의 부당함, 나를 둘러싼 모든 제약들, 세상에 대한 원망들이 잠시나마 잊히는 것 같은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글에 빠져있는 동안만큼만은 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내게서 짜낼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몸에 있는 기름 한 방울이라도 다 쥐어짜 내듯 그렇게 나를 드러내기 위해, 내가 여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무섭게도 글쓰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난 그 시간을 통해 '무아지경'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생동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그 '몰두'의 기적으로 난 고등학생 때 소위 말하는 '문학특기자'가 되어 있었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주목받고 인정받으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그리 절망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달콤하면서도 매혹적인 일이었다. 그건 마치 중독과도 같은 것이어서 당시의 나는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 같은 촛불과도 같은 상태에서도 누구의 칭찬 한마디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 불씨를 살려내 글쓰기로 하여금 나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고는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도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 한다면 문학과 글쓰기에 빠져있던 그 열일곱, 열여덟 그 시절을 떠올리고는 한다.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다 간 전혜린의 비극적 삶에 중독되어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몇 번이고 읽어 내려가며 삶은 뭐고,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할 때, 나는 진정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고, 깨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도 내가 살아있다는 걸 다시금 상기하고 싶을 때 몰두할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넉넉잡아 지금까지 총 살아온 삶이 시간이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가늠해 대략 2/3 가량 정도를 살아냈다고 했을 때, 그렇게 인생의 60~70%가량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무언가에 전적으로 몰두해 본 것이 몇 번이나 되었을지를 생각해 본다.
글쓰기에 매혹되었던 10대 이후, 그리고 풋사랑의 열기에 잠깐 정신을 잃었었던 20대 초반 이후, 안타깝게도 난 내 생에 진정 무언가에 열중해서 몰두하며 살아온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20대 중반쯤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되새겨보면, 이상하리만치 난 내 생의 모습이 어떠했었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얼마 안가 추수 단계에 접어들지도 모를 내 생을 맞이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더 늦어지지 않게, 내가 다시 한번 무언가에 그야말로 미친 듯 빠져볼 수 있기를 말이다. 그 미침에 가까운 '몰두'가 다시 깨어나는 날. 나는 그동안 잃어버린 근 20여 년의 시간들을 다시 되찾고, 나아가 죽어가는 나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또 다른 20년을 살아낼 수가 있을 것이고, 그 길의 끝에서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