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억 or 추억

기억의 전이

by 꿈꾸는 카프카

'기억' (記憶)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추억'(追憶)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예전에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떤 가수가 엄마들의 카톡 배경화면에는 왜 그렇게 꽃 사진이 가득한 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가수의 이야기인즉슨, 엄마의 카톡 배경화면에 사시사철 꽃 사진이 가득한 것은 그렇게 꽃다웠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애타게 그리워함이거나, 혹은 언젠가 지고 말 그 꽃의 가혹한 운명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그것의 찰나라도 붙잡아보고 싶은 마음에서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새삼 우리 엄마의 카톡 배경화면에도 아름다운 풍경이나 꽃 사진이 가득하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가수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엄마의 카톡사진을 보니 진짜 사진 속 엄마는 아름다운 꽃들 앞에서 해사한 얼굴로 한껏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지금 그 꽃과도 같은 화려한 시절로 돌아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서도 각자 지난날의 추억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 추억이란 그 모양에 따라 달콤한 사탕마냥 핑크빛 사랑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쓰디쓴 커피의 알싸한 향취마냥 가슴 쓰린 이별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한여름 녹음의 무성한 초록빛 보다도 더 싱그러웠던 젊은 날 우리의 꿈에 관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각저의 가슴속에 잊지 못한 추억 한 두 가지쯤은 품고,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가 각자의 어떤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머도 그것이 어떠한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기억'에 관해서 과학적으로 접근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장면들은 그 당시 자신이 느꼈던 특정한 감정과 저절로 연결되어 우리의 기억 회로에 저장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기억이 인출될 때 그것과 연결된 감정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불안이나 공포, 슬픔의 감정들과 연결되는 기억들이 그렇지 않은 기억들보다 훨씬 더 많다. 그렇다 보니 나는 평소에 의식적으로라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되새기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것도 내 마음 같지 않을 때는 조지 오웰이 쓴 '1984'에 나오는 것처럼 차라리 내 기억이 전혀 다른 내용의 것으로 조작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기억이란 것이 내가 원하는 내용의 것들로만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지금도, 그게 가능할 미래의 어떤 순간을 꿈꾼다.

앞서 말했다시피 기억이란 녀석을 그것이 당시의 어떤 감정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트라우마로, 누군가에게는 산뜻한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삶은 기억의 연속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기억은 곧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나아가 기억의 누적은 곧 자기 자신을 형성하게끔 한다.


때때로 그 기억의 더미들은 어떠한 파편으로 남아 특정 자극에 예전의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게도 하는데, 내게는 특히 노래가 그러하다.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 중 지금도 듣기만 하면 나를 예전의 그때로 돌아가게끔 하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잠시 그 노래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더 클래식 [마법의 성]


1994년에 발표된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이다. 28년 전 이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때 아홉 살의 나는 난생처음 혼자 타 본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분명히 며칠 전 엄마와 함께 예행연습을 해 보았을 터인데 내 기억 속 그날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어딘가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수업을 마치고 호기롭게 오른 버스에서 나는, 이미 버스에 탄 그 순간부터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단은 뭐랄까. 버스 안의 공기가 왠지 모르게 엄마와 함께 탔던 버스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고, 용강동에서 아현동 쪽으로 가야 하는 버스는 어느새부턴가 반대편인 여의도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그날의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 장면 하나하나, 마치 머릿속에 사진을 찍어 박아놓은 것 마냥 그대로 남겨져 있다. 버스가 내가 가야 할 방향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꺾던 그 순간에 창밖에 비쳤던 가든호텔의 그 웅장함.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나서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속으로 끙끙대던 찰나에 내 귀, 내 온몸을 적셨던 1994년 최고의 그 히트곡.

우리에겐 저마다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특별한 매개체가 하나씩은 있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자칫했다간 길을 잃어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그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저 노래가 귀에 들어왔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다.

속으로는

'안돼, 안돼. 버스야 나를 거기로 데려가지 마. 나를 그만 내려줘.'라고 수없이 외치고 있었으면서도 입 밖으로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식은땀만 뻘뻘 흘리던 소심한 여자아이.

그때 나는 정말 창밖으로 보이는 가든호텔이라는 '마법의 성'을 지나 마포대교라는 '늪'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자유롭게 저 하늘 멀리 날려 보내줄 '그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보낸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나에게는 마치 영겁의 시간과도 같이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성적이고 겁 많은 여자아이가 자기 앞에 닥친 절망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포기하고 있을 때, 기적처럼 갑자기 어딘가에서 도움의 손길이 드리워졌다.


"얘, 어디 아프니?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릴까? 버스는 혼자 탔니? 엄마는?"

버스 한 구석에 완전히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애매한 자세로 서서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제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꽤나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아주머니를 붙잡고 애원했다.

"그게 아니구요. 제가 분명 우리 집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자꾸 이상한 쪽으로 가요."

눈물, 콧물 한 바가지에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 그 여자아이의 심중을 기가 막히게도 알아챈 아주머니는 고맙게도 딱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그 길로 버스에서 내려주었다.

그날에 대한 내 기억은 딱 여기까지 남아 있다. 그 후에 내가 어떻게 해서 집까지 돌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의 버스 안을 가득 채웠던 그 노래와, 당시 불안하기만 했던 그 마음과, 그리고 이름 모를 그 친절한 아주머니에 대한 고마움뿐이다.


지금도 가끔 라디오에서 <마법의 성>이 흘러나올 때면 어김없이 나는 아홉 살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막막한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버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있었던 한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요즘에야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공포에 떨고 있는 그 아이를 껴안으며 이런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얘. 괜찮니? 울지 마. 내가 집으로 데려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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